같은 노동자들은 어떻습니까. 한국노총이 MB정권의 앞잡이가 되고 민주노총마저 지도력과 운동성을 잃어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하여 그 강성한 다른 금속노조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일이 아닌양 뒷짐 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같이 일하던 비해고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측이란 이름으로 해고노동자, 그들의 가족들을 위협하고 자본가를 대신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찬 정상조업이란 완장은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 입니다. 일제와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 남은 반민족주의자들의 청산되지 못한 완장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쌍용자동차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이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연민하지 않고 연대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기에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이 권력은 어떤 형태로든 청산될 것이고 댓가를 치루게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뒷짐 진 대게의 사람들, 사측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맘껏 행사한 비해고노동자들의 파괴된 공동체의식은 다시 회복될까요? 솔직히 쌍용자동차를 위해 특별 세금이라도 더 내야 한다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라진 연민과 연대 의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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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노동자들은 어떻습니까. 한국노총이 MB정권의 앞잡이가 되고 민주노총마저 지도력과 운동성을 잃어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하여 그 강성한 다른 금속노조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일이 아닌양 뒷짐 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같이 일하던 비해고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측이란 이름으로 해고노동자, 그들의 가족들을 위협하고 자본가를 대신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찬 정상조업이란 완장은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 입니다. 일제와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 남은 반민족주의자들의 청산되지 못한 완장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쌍용자동차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이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연민하지 않고 연대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기에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이 권력은 어떤 형태로든 청산될 것이고 댓가를 치루게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뒷짐 진 대게의 사람들, 사측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맘껏 행사한 비해고노동자들의 파괴된 공동체의식은 다시 회복될까요? 솔직히 쌍용자동차를 위해 특별 세금이라도 더 내야 한다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라진 연민과 연대 의식 입니다.
http://www.vop.co.kr/A00000259421.html
우리는 무엇인가?
이용득의 해로움
단식,
1983년 김영삼의 단식투쟁 부터 단식은 저항의 한 상징이 되었다. 물론, 단밭빵 먹으며 단식 했다는 가십은 집어 치우더라도 3당 통합으로 단식을 다이어트로 끌어 내린 학실한 장본인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저항과 투쟁에는 단식이 단골 메뉴다. 마치 밥 먹듯 단식 한다는 말처럼. 민주화 이후에 투쟁을 위한 단식은 사라질 줄 알았다. 아니, 십장의 뇌와 디젤 불도저의 신체로 무장한 2008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사라져야 할 미국산 쇠고기 메뉴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값싸며 품질 좋은 쇠고기를 먹으며 황제 다이어트를 할 것 같은 나라에서 단식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의 얘기 같다. 아무도 단식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KBS 에 경찰이 진입하여 농성 중인 직원들을 강제 연행하고 불법적인 이사회를 강행했어도 KBS 는 온전히 올림픽 방송 중이다. 사람들은 "KBS 에 경찰 난입" 을 안드로메다에서 발사된 알 듯 모를 듯한 코드로 인식한다. 현대사회에서 주목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짜라고 인식된다. 단식, 그야말로 밥 먹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른다. 고로 가짜다. 조중동에서는 KBS 에 경찰은 난입하지 않았다. 이명박과 최시중의 위대한 국가 경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뿐이다. KBS 노조가 뒤늦게 투쟁! 삭발을 제 아무리 해도 그건 가짜다. 주목 받지 못한다.
기륭전자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은 58일동안 단식 중인데도 주목하는 사람은 적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사실에 입각해서 주장한다고? 기륭전자의 기업가치와 이익,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세계적 경쟁력은 진짜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58일간의 단식은 가짜일까? 어떤 것이 사실일까. 자의적 사실은 모두 가치적일 수 밖에 없다. 기업이익을 위해 비정규 노동자 몇명은 굶어 죽어도 되는 가치, 굶어 죽는 고통의 문턱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지는 비정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노동으로서의 가치, 무엇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진짜가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제 밥그릇 찾으려고 저런다고 한다, 그렇다, 제 밥그릇과 자의식과 주변의식과 제 식구들 챙기려고 58일동안 단식한다. 최소한 다른 밥그릇 찾아서 그 밥그릇을 차지해야 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시도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각성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그 예의의 댓가로 58일 단식이라는 처절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해야만 가치를 가지는 민주주의 잔인함과 맥락이 닿아 있다. 박태환의 4년, 체중조절에 실패한 유도의 최민호의 4년은 기억해도 기륭전자 노조원의 1000일, 58일간의 단식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것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체육관에 모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립해 있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워 하는 이 몇분의 순간은 감동적이다. 박태환 자신에겐 매우 큰 영광이며 노력의 댓가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 순간의 감동일 뿐 우리의 사회적 삶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것은 국가와 스포츠, 범세계적인 올림픽이 만들어낸 가짜다. 진짜는 우리의 삶에 끝까지 영향을 미칠 진지한 사회적 현안의 접근에 있다. 기륭전자 노동자가 만들어 낸 1000일과 58일간의 단식, 이 잔인함과 처절함에 접근하는 것이 우리 삶에 자양되는 진짜 사실이다.
단식 투쟁을 지지 한다고? 이것은 다이어트가 아니다. 단식 투쟁 지지는 죽음에 대한 지지를 도모하는 것으로 말도 안되는 잔인함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언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폐에 물이 차 죽어간다. 왜? 이 뙤악볕에 폐에 물을 채워 죽어 가야만 하는가. 저들은 죽어 간다, 그리고 죽는다. 명백한 사회적 죽음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이상 연민따위도 느끼지 못하는 갈 때까지 간 잔인한 우리 사회의 방치다.
더욱 격해지고 있는 대선 정국과 삼성 비자금 폭로로 인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다. 예년 보다 뚝 떨어진 기온으로 가슴이 시렸던 시월 한달 동안 두명의 도시빈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양시의 노점상 탄압에 비관한 이근재씨는 10월1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인천건설노조 소속 비정규직 전기원이던 정해진씨는 10월27일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조합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마지막으로 분신 사망했습니다. 한미 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와 경찰폭력에 사망한 하중근 열사의 조의가 채 풀리기도 전에 우리가 일상으로 걷는 거리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비정규직이란 이름과 인간 답게 살려는 외침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요구와 열망이 있던 6월항쟁 때에도 이렇게 많은 동시대인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권력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은 인간성과 의식을 잠식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자본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그 사나운 지배력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름을 지향해야 할 자유로운 의지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세욱, 정해진 열사는 깨지 말았어야 할 꿈에서 깨어 누구보다 먼저 현실을 깨달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절대 어쩔 수 없는 현실, 그것에 맞서는 자신의 작은 노동이 아무리 필사적이어도 결코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의 고독은 번민으로 고통스러웠을 것 입니다. 그가 떠나고 기적처럼 견뎌야 하는 가족들을 보고도 스스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뿌릴 수 있는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열사로 불리는 것 조차 모자랍니다. 어느 시대의 시보다 소설보다 더 시적이고 허구적인 현실이 무섭고 슬픕니다.
노점은 누구나 똑같은 목구멍에 그나마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어떤 이의 좌판입니다. 여러분은 그 좌판을 없애고 청계천에 꼭 물을 흘려야 겠습니까? 그래야 국가가 대단한 발전을 이루고 글로벌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통과된 이후 전보다 보호 받으며 잘 산다는 노동자는 없는데, 왜 노동자들 괜찮다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말만 원칙이 되는지 여러분은 아시는지요? 대선보다, 삼성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킴스클럽의 진열대 위에 처분을 기다리는 고등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지 37년 되었습니다. 37년 동안 우리는 민주화를 이뤘고 노동조합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사 반란 정권을 단죄하기도 했으며 평화적으로 문민 정부를 이양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에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하는 노동자가 그대로 이고 도시 빈민들은 자본과 권력의 폭행에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지경 입니다. 어떻게 노동자의 외침이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 그동안 여러번이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시스템이 바뀌었는데 노동자의 깃발은 여전히 핏빛 입니다. 우리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을 한낮 과격 단체로만 치부하고 왜 저들이 저리 싸우는 데도 또 싸우고 또 투쟁하고 죽어가야만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권영길이하고 이석행이하고 비자금이라도 삥뜯을라고 하는 것인가요? 허세욱, 정해진, 하중근, 이근재 노동자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는 사회가 아닙니다.
대선, 삼성이 중요한가요? 그렇다면 내년에도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고등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자유롭게 심연을 헤엄치는 등푸른 날생선이 될 것인지, 우리들의 선택과 행동이 그렇게 할 것 입니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인간에게 노동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즉,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을 생계 유지라는 기능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토지나 자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문적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생계가 유지되고 개별적인 자아를 실현한다. 굳이 생계의 수단이 아닌 노동을 할 때에도 인간은 자아를 찾게 된다. 이것은 노동이 개인의 이기적 욕구 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절반의 고독과 절반의 소통으로 이루어 진다. 소통은 타인과 공유하는 의견과 타인과 관계하는 노동으로 고독만으로 관찰되지 않는 상호 작용이다. 흔히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회사를 통해 직업을 가진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은 회사나 직업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이로 인해 직업은 자아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회사에는 지식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호 작용은 하고 있지만 지식과 자본으로 소통하고 있기에 상호 작용의 대상과 소외되어 언제나 고독하다.
IMF 사태 이후 회사는 무너졌다. 하지만 회사는 자본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신자유주의 플랫폼으로 다시 살아 났다. 실제로 무너진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계측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제 기준이라는 각종 수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사 나아가 사회 구조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를 내림으로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강도 높은 긴장을 주입한다. 일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더 이상 그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수치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장 받지 못한다. 회사의 조직은 이러한 표준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이 왜 노동을 멈춰야 했고 언제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사유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정확히 노동자는 개인의 단위 노동만으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에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인문적 관점을 버리고 자본의 이동과 축적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회사에서 노동으로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은 쉽게 노동을 잠식했고 자본을 위한 종사와 복무의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한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서 창출하는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지 노동의 이익이 아니다. 회사는 이익구조인데 인간은 그 이익구조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조직은 개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자본가 다운 생각을 해도 회사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는데다가 자본시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공격할 뿐 잉여자본을 분배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의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통화 정책에 따라 축적된 자본으로만 유입된다. 탈근대적인 신자유주의의 구조는 열심히 일해도 노동임금이 늘어 나거나 생계의 긴장을 여가의 여유로 돌릴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자본이나 공공 기금으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을 흡수한 회사는 공공적 성격이나 하물려 타인과 소통을 일으켜 자아를 실현하는 그 어떤 속성도 부정하고 있다. 즉, 회사는 이익 집단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 오늘날 노동의 왜곡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화폐의 왜곡 만큼이나 심해서 노동자 조차도 회사의 이익이 온전히 노동임금으로 돌아 오고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회사가 일조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노동자 임금을 인플레이션으로 빼앗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 임금을 간단히 환율과 지배구조로 제압할 수 있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윤리도 사라졌다. 누구도 회사의 목적이 이익 창출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익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는 더 이상 윤리가 필요 없게 되었다. 회사는 공공연히 가치 경영을 얘기한다. 이익과 자본의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해도 윤리에 하자가 없게 되자 회사는 노동도 공공의 선도 사회 안전망도 인간의 품위도 가치 경영의 플랫폼에서 명령 받아야 되는 존재, 즉 자율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회사는 직업을 생성하고 직업에 가질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노동자와 자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와 자본을 창출하고 창출된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고 자아를 가진 노동자와 함께 사회 공공적 활동에 이익을 재분배하는 순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회사는 가정과 함께 사회를 거의 양분하고 일부분을 학교에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그렇다. 자본가도 자본을 생각하고 노동자도 자본을 생각하는 회사에서 인간이나 노동의 위치는 자본보다 못하다. 자본이 오로지 회사와 노동자간에서 움직이는 폐쇄적인 화폐로 인식하는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때의 임금과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돌봐줄 사회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가정의 역할을 재설정하고 학교는 자본의 명령에 의해 회사에서 자본을 창출하고 시장에서 임금을 빼앗길 노동 없는 노동자를 생산하여 수혈하기 바쁘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자본과 노동자의 증오만 남아 있다. 회사가 추구하고 선전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는 착취 당한 노동을 위로하여 자본 창출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회사의 가치는 모두 거짓이며 이러한 거짓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는 사라졌다. 분명하건데 곧이어 가정과 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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