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홍대앞에서 시각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와 산학협동 차 만나서 샤브샤브를 먹었다. 산학협동이 협동이란 긍정적 수식 명사로 정서적으로 평등하게 보이고 매우 실천적인데다가 산학이란 빛 좋은 약어로 인해 실용의 트랜드마저 느껴진다. 산학협동은 엄밀히 말해서 산학협상이다. 학생들의 등록금은 올려 놓고 학자금 대출 이자를 줄여 주는 시장 원리가 산학협동 안에 그대로 작동한다. 만면에 온갖 가식의 지성과 마치 이익을 사회환원 하러 나온 듯한 표정으로 학교를 걱정하고 기업을 걱정해 주며 화답한다. 얄팍한 고기를 익히는 젓가락질이 칼날 부딛치듯 소리를 내고 얄팍한 미덕이 저마더 얼굴에 번질번질 셀로판지를 깐다. 얼마나 얇은지 술 몇순배 돌자 죄다 찢어지고 만다.
솔직히 우리 학교 애들 수준이 너무 낮아요. 솔직히 요즘 애들 근성도 끈기도 없어서 사회에 내보내도 되나 할 정도에요. 그렇다고 오프라인에 보내려고 하니 요즘 오프가 정말 말이 아니어서 보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학교에선 온라인 교육 보다 오프라인 교육에 아직도 열을 올리니.. 꼭 인턴 또는 학교 다니면서도 애들 빼서 기업에 넣어 드릴 수 있어요, 돈을 안주셔도 되요 괜찮다 싶으시면 그때 주셔도 되고 채용하시면 더 좋고요.
아시겠지만, 기업에서 산학협동을 하겠다는 것은 우수 인력 확보,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 알고 계시죠? 아니 모 인턴은 정부에서도 지원을 해주는 것이고 그냥 이쪽으로 출근하는데 교통비 점심비도 없이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하면 저희도 불편해요, 적지만 어느 정도는 책정해서...
얄팍한 고기덩어리가 빨리 익어서 다행이다. 그날 구토가 나서 힘 닿는대까지 술을 마셨다. 어쨌든 학생들을 만나 케리어패스가 어떻고 사회가 만만치가 않아 따위의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헤어졌다. 수준이 높고 낮은 학생들을 정해 놓고 만나 본 적이 없는터라, 일단 만나보고 그 수준이란 지표가 어떻게 정해지고 초중고에서 말하는 변별력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서로 순수한 마음이 없다보니 산학과 협동에 대해 주관적 견해나 집단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데 급급하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가선 이쪽에서 겸임도 가능하다는 투로 오해될 소지가 있고 이쪽에서는 협동기금을 마련해서 학생들에게 소정의 급여를 줘야 한다는 왜곡이 존재한다. 실제로 그 학교가 그렇게 잘났나? 는 반응이 심장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이 학교가 이른바 Sky 반열에 들었다면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어쩌면 나와 기업은 더 순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아가 수준이 낮은 애들이 있다니 다행이고 산학협동을 통해 그 애들에게 희망과 케리어패스를 얘기해주겠다며 설레발을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단이 우수하다고 판단되면 개인에 대한 변별력이 떨어지는데 -변별력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우세한데- 반해 집단이 허접하면 개인의 우수함을 판단하는 변별력은 기능하지 않는다. 이런 방정식이라면 수준이 안되는 집단에서 개인의 우수함을 판단하여 기업의 인력화 시킨다는 발상은 큰 오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산학협동의 순진(?)한 목적도 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익혀 먹은 샤브샤브 한바탕에 피해는 교수도 나도 아닌 학생들이 본 셈이 됐다. 그 잘난 호주산 소고기 한 점 입에 대지도 않았고 제 삶과 꿈이 따로 있을 애들은 졸지에 수준 낮은 부류로 취급 당했다. 나와 같은 기성세대가 이 사회를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놓고 애꿋은 20대에게 도전정신이 어떻고 끈기가 죽었다고 맨날 떠들어 대는 내 안에 사이비는 얼마나 악랄한가. 기업의 철저한 시장원리에 비닐을 덮고 비쳐지지 않는 양 희망을 판서 하는 것이 얼마나 비양심적인가. 남은 것은 학교의 특징, 직업의 특성, 어쩔 수 없는 기업의 이익추구 따위를 들먹이며 결국 목구멍의 명령에 주눅 든 밑도 끝도 없는 속물의 항변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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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서 자살 방지를 위해 면티 하나 입고 있는 촛불집회 연행자에게 브래지어를 벗으라 했다 한다. 놀랄만한 일이 아닌 것이 여기자와 술집 여주인의 가슴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교양에 마사지걸의 얼굴과 서비스의 질적 수준 정도는 알고 있어야 정치가 되는 세상에서 브래지어 호크 열고 닫는 것 쯤이야 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우리 사회의 양심적(?)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경찰서에 유치되기 전에 브래지어를 벗으라는 법은 없다. 자살이 어떤 실존적 의미인지 알길이 없는 경찰관에게 브래지어가 자살용 도구 일리도 없다. 브래지어가 50kg 정도 되는 보통의 여성을 매달 만큼 장력을 지닌 섬유구조로 짜여 있는지 그 좋아하는 과학적이며 국제적 근거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이건 법이 아니라 법집행, 아니 인간의 양심의 문제인데 도대체 그 양심에 털이 난 건지 가출을 한건지 모를 일이다. 아주 수준 낮은 양심을 스스로 고발한 셈인데, 브래지어 벗기는 일이 예삿일인 사람 아니고서야 생면부지의 여성에게 브래지어 벗어, 이런 말 평생하기 힘들다. 경찰관? 법의 집행 따위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텐데 분명 변태마초들이다. 브래지어 벗기면 팬티 벗기고 싶은게 마초들이고 그 성질은 대통령이고 나도 모두 공통분모다. 아니라면 거세다. 다만 변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무데서나 벗기지 않는 것 뿐이고, 함부로 누구한테 명령하지 않는 것 뿐이다. 함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초딩적 양심인데 경찰의 양심은 법 아래 존재한다는 유아적 양심의 자기 고발인 셈인데다가 일말의 양심 따위를 교육한다는 대한민국 교육제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은 스스로 복제를 하고 예술도 복제를 한다는데 위에서 하는 못되쳐먹은 양심을 아랫것도 복제를 하고 난리다. 이거 무슨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인가. 더 희안한 건 옆에 있었다는 여경이다. 경찰 되려면 여성성을 제거하는 훈련이라도 받는 것인지, 남성이 마초와 변태마초로 구별되듯 성기가 같다고 다 여성은 아닌 것이다. 아무튼, 남자 경찰관들의 그 변태마초적 기질과 못된 양심의 복제에서 비롯된 것, 법대로 하려면 브.래.지.어. 가 법조항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자살 방지의 확대 해석은 아닌 것이고, 이건 솔직히 브래지어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 아니겠는가.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빨고 싶은 판타지에서 비롯된 이 변태적 법집행이 새로운 예술 사조의 개척이 아니라면 비난 받아 마땅하다. 어머니, 아내의 가슴 그리고 세상 모든 여성의 가슴에 반성하라는 뜻으로 시인 박영희의 시 하나 남긴다. 잘 읽고 가출한 양심 찾아 왔으면 싶다. 뭐 양심도 복제하는 사이보그 클론들에게 바라기엔 무리이긴 하지만.
- 글을 쓰고 나서 기사를 검색해 보니 마포, 강남에 이어 중부에서도 브래지어를 벗으라 했다는 군요. 이제 보니 경찰들, 색소 묻은 여성 속옷 수집광들이었군요. 양심이 없어도 정신병은 걸리나 봅니다. 이런 변태들이 바바리맨 잡아서 바바리는 벗겨서 유치하는지 모르겠군요.
아내의 브래지어
장준혁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하얀거탑의 드라마적 충격은 이미 두 차례에 걸친 포스팅을 통해 스스로 밝혔던 바 있다. 하얀거탑이 그린 무서운 사회의 원본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닌 양 비겨서는 문화적 논란이 과연 현실을 직시하는 올바른 태도인가? 라는 의문을 푸는데는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곧 전공의를 할 친구와 얘기를 나누어도 씁쓰름하게 다가오는 의사 조직의 추잡함은 대략 짐작을 넘어 거탑의 음지가 실로 어둡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세속의 관심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대학병원 과장을 하면 그만큼 벌 수 있을까?' 라는 재미 또한 현실의 막막함으로 금새 들통 난다. 대학병원 과장을 거치고 인천에 개원한 한 노의사의 지나가는 말은 이랬다. '과장하고 개원하는 것과 못하고 개원하는 것은 한...30억 차이 날 걸' 지인들을 통한 은밀한 확인 작업은 그렇다 치고, 병원을 방문하여 과장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특진이란 특별한 접수를 해야 함을 강요하는 공공연한 상업 행위 앞에서 아픈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나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천박한 자본주의만을 확인할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치밀하게 복무한 장준혁의 죽음 앞에 겸허해지는 것은 그도 인간이라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안타까움 때문에 흔들리는 인간적 감수성이 있어서 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명백한 사회 암적 존재이고 약자를 핍박한 강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 인데다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하는 환자 가족들이 극적 전개상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된 것은 특히나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혹자는 종종 하얀거탑에는 선과 악이 없다, 또는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이 불편해서 유보하는 입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위험한 중도이거나 남이 판단하면 따라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자세일 뿐이다. 옮고 그름의 판단은 그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양심의 소리에서 나온다. 조직 생활을 해보니 장준혁처럼 살지 않으면 안되겠더라 약하다 싶은 타인은 철저히 부수고, 그동안 핍박 받아온게 얼마인데 줄을 대서라도 출세를 해야 겠으며, 그러한 수단이 좀 부당하고 남에게 어떤 해가 되어도 할 수 없다면 장준혁이 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장준혁의 외적 모습에는 반했지만, 내적 악의 잠재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는 대게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반민주적인 행위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양 있다는 사람들이 중도에 서 있고, 지식 있다는 사람들이 양비하는 자체가 반민주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나 갖고 있는 헌법적 양심의 소리를 범국가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얀거탑보다 휠씬 무섭고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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