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일이던가? 작년 2월? 그들의 수상한 행보가 결국 이명박과 정책 연대라는 레토릭으로 포장되던 때가. 정체성과 노동을 반동했던 당시 위원장이나 찬성표를 던졌던 노동자이며 동시에 자본가들이 더 보태어 권력의 강아지임를 선언했던 때가. 지금 그들이 '열받고, 토사구팽 당했다' 한다. 그들 스스로 쟁취하길 원했던, 그러한 정치적 수사 쯤이면 쟁취할 것 만 같았던 '대박' 의 꿈이 사라졌다며 그야 말로 징징거리며 이제서야 분쇄를 운운한다. '황석영의 스팸'이다. 이것은 한국노총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의 열받음으로 해로움이 희석될리 없다. 게다가 배신감을 한나라당 앞에서 외친다. 딸랑딸랑 봐달라는 얘기다. 다른 노동자들과 공동체에 머리를 조아리고 반성을 해도 모자를 판에 열받음을 핑계로 방구질이다. 세상이 지나가던 강아지 새끼도 '이 놈이 정규개새끼인지 비정규개새끼인지' 따지는 어수선한 판국이다. 그마저 그거 아니면 살 길 없는 그들 살리 겠다고 다수당에 안되는 쪽수로 협박하고 통하지도 않는 윽박을 질러대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서도 기껏 딸랑거린다는 것이 '성과급을 삭감해 정규직 임금마저 깎아버리자'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해로워도 이렇게 해로운 덩어리가 없다.

http://www.vop.co.kr/A00000259421.html


우리는 무엇인가?
이용득의 해로움
2009/07/09 20:20 2009/07/09 20:20
DrunkenSTAR 이 작성.

단식, 기륭전자

2008/08/10 16:56 / 생각
현지는 이제 5.8킬로, 2.49킬로로 태어나 백일이 지났다. 제 양껏 먹고 잘 자고 일어나면 베냇짓으로 아빠의 간장을 녹인다. 어느 날 현지가 제 양껏 먹어야 할 것을 거부 한다면 나는 어떨까? 제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그 이유가 해소될 때까지 먹는 것을 거부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안먹으면 죽는다. 아마도 혈당이 감소하여 심장기능이 저하되는 심부전이 일어나고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하나 보다. 서서히 죽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온갖 고통이 서서히 스며 들 것이다. 보는 기능을 상실한 눈으로 그 이유와 헛것을 번갈아 교차시키는 끔찍함으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어느 아비가 제 자식이 먹기를 거부하며 이런 고통을 감당하려는 것을 담담히 지켜 볼 수 있을까. 또는 어느 자식이 제 아비가 먹기를 거부하는 사태에 저는 살겠다고 온전히 먹기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밥상머리에 같이 앉는 것이 식구 인데 제 식구가 먹지 않는 것을 보며 견디는 것은 먹지 않는 것처럼 기적적인 일이다. 일부러 먹지 않는 일은 자살과도 같은 일이다. 다이어트? 이것도 일종의 자의식이다. 자살로 실존을 증명하듯, 살면서 타인의 증명을 통해 실존하려는 다이어트도 충분히 자의식이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해야만 하는 주변의식과 먹기를 거부하려는 자의식이 합쳐진 의지를 다이어트라고 부르진 않는다.

단식,
1983년 김영삼의 단식투쟁 부터 단식은 저항의 한 상징이 되었다. 물론, 단밭빵 먹으며 단식 했다는 가십은 집어 치우더라도 3당 통합으로 단식을 다이어트로 끌어 내린 학실한 장본인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저항과 투쟁에는 단식이 단골 메뉴다. 마치 밥 먹듯 단식 한다는 말처럼. 민주화 이후에 투쟁을 위한 단식은 사라질 줄 알았다. 아니, 십장의 뇌와 디젤 불도저의 신체로 무장한 2008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사라져야 할 미국산 쇠고기 메뉴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값싸며 품질 좋은 쇠고기를 먹으며 황제 다이어트를 할 것 같은 나라에서 단식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의 얘기 같다. 아무도 단식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KBS 에 경찰이 진입하여 농성 중인 직원들을 강제 연행하고 불법적인 이사회를 강행했어도 KBS 는 온전히 올림픽 방송 중이다. 사람들은 "KBS 에 경찰 난입" 을 안드로메다에서 발사된 알 듯 모를 듯한 코드로 인식한다. 현대사회에서 주목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짜라고 인식된다. 단식, 그야말로 밥 먹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른다. 고로 가짜다. 조중동에서는 KBS 에 경찰은 난입하지 않았다. 이명박과 최시중의 위대한 국가 경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뿐이다. KBS 노조가 뒤늦게 투쟁! 삭발을 제 아무리 해도 그건 가짜다. 주목 받지 못한다.

기륭전자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은 58일동안 단식 중인데도 주목하는 사람은 적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사실에 입각해서 주장한다고? 기륭전자의 기업가치와 이익,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세계적 경쟁력은 진짜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58일간의 단식은 가짜일까? 어떤 것이 사실일까. 자의적 사실은 모두 가치적일 수 밖에 없다. 기업이익을 위해 비정규 노동자 몇명은 굶어 죽어도 되는 가치, 굶어 죽는 고통의 문턱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지는 비정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노동으로서의 가치, 무엇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진짜가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제 밥그릇 찾으려고 저런다고 한다, 그렇다, 제 밥그릇과 자의식과 주변의식과 제 식구들 챙기려고 58일동안 단식한다. 최소한 다른 밥그릇 찾아서 그 밥그릇을 차지해야 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시도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각성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그 예의의 댓가로 58일 단식이라는 처절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해야만 가치를 가지는 민주주의 잔인함과 맥락이 닿아 있다. 박태환의 4년, 체중조절에 실패한 유도의 최민호의 4년은 기억해도 기륭전자 노조원의 1000일, 58일간의 단식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것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체육관에 모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립해 있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워 하는 이 몇분의 순간은 감동적이다. 박태환 자신에겐 매우 큰 영광이며 노력의 댓가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 순간의 감동일 뿐 우리의 사회적 삶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것은 국가와 스포츠, 범세계적인 올림픽이 만들어낸 가짜다. 진짜는 우리의 삶에 끝까지 영향을 미칠 진지한 사회적 현안의 접근에 있다. 기륭전자 노동자가 만들어 낸 1000일과 58일간의 단식, 이 잔인함과 처절함에 접근하는 것이 우리 삶에 자양되는 진짜 사실이다.

단식 투쟁을 지지 한다고? 이것은 다이어트가 아니다. 단식 투쟁 지지는 죽음에 대한 지지를 도모하는 것으로 말도 안되는 잔인함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언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폐에 물이 차 죽어간다. 왜? 이 뙤악볕에 폐에 물을 채워 죽어 가야만 하는가. 저들은 죽어 간다, 그리고 죽는다. 명백한 사회적 죽음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이상 연민따위도 느끼지 못하는 갈 때까지 간 잔인한 우리 사회의 방치다.
2008/08/10 16:56 2008/08/10 16:56
DrunkenSTAR 이 작성.

한국엔 애초부터 정규직은 없다. 노동을 할 수 있어도 자본이 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노동을 할 수가 없다. 우리 모두의 존재는 비정규직이고 언제든지 버림 받을 수 있다. 노동을 하는 자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소외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연대와 투쟁, KTX 승무원들이 현재까지 견디는 방법이다. 오늘 이랜드 사태에도 노동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고작 연대와 투쟁 뿐이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페이소스인 KTX 승무원과 월급 80만원을 지키기 위한 우리 어머니들이 이토록 투쟁을 벌여야 하는 사회는 명백히 재앙이다. 오늘날 이랜드 사태를 통해 노무현 정부와 이상수 등을 규탄해야 할 의무는 우리 모두의 당연한 몫이다. 하지만, 불행이도 이러한 운동적이며 공공적 책임에 무감각한 부류도 역시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노동자들이다. 노동이라 생각하지 않는 엘리트 화이트 칼라들, 취업 공부만 있을 뿐 직업 공부가 없는 대학생들, 여전히 로또로 인생 역전만 희망하며 현실과 현장을 직시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의 존재 부정이 이들의 투쟁을 자신들의 불편만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얼마나 악랄한 패러독스가 가득한 세상인가, 기업과 자본에 봉사하는 법안을 만들어 놓고 일명 '보호법' 이라는 수사로 진실을 가리고 그게 두려워 비정규직을 공권력이란 폭력의 이름으로 때려 잡는 사회가 과연 인간이 살만한 사회인가. 우리는 무엇으로도 투쟁할 수 있다. 이랜드가 130억 헌금으로 모시는 그 잘난 예수보다 더 신성한 노동으로 존재를 규정할 수 있다. 우리의 신성한 가치는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명백한 생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정규직 아니다. 잘 사는 것을 돈 잘 버는 것으로 규정하는 당신, 정규직이라며 안도하는 당신, 잘 생각해보라 당신 정규직 아니다. 안이한 생각을 거두고 자본과 권력의 폭거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이랜드 사태를 주목해야 한다.


천민자본주의 선교하는 이랜드의 계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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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0 22:33 2007/07/20 22:33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