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 슈퍼마켓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먹고 초등학생이 죽을 확률은 얼마일까? 확률적으로 학교 앞 슈퍼마켓이 권리금 받고 빠져 버리기 전에 초등학생이 죽을 확률은 로또 1등 맞아 돈 찾아 나오다가 벼락 맞을 확률과 같거나 낮을 듯.. 따라서 불량식품을 팔아 이익을 얻어야 하며 정부는 확률적으로 말이 안되기 때문에 불량식품 판매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한다. 이러한 규제는 실용적이지 못하다. 더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확률적으로 거의 발생 불가능한 것을 두고 이익을 제한하니 말이다. 사서 먹을지 말지, 먹고 죽을지 말지는 초등학생 몫.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정부가 아니라 상점이다. 그렇지! 그는 CEO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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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는 국민을 섬긴다. 정치적 발언으로는 그렇다. 정치적이란 범주는 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으로 요약될 수는 없다. 정치는 사람간의 소통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도 생각을 발언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설득력에 따라 다른 사람을 그 의도대로 다스리곤 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자기의 말에 10명이 동의하면 무슨 일이든 하기 편하다. 10명이 리더쉽과 권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은 생활 속의 권력에서 더 많은 수 더하기 법으로 정해 놓은 몇가지 규칙만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을 쟁취하기 위한 선거판의 에너지는 인간의 의지 중 전쟁 다음이 아닐까 한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섬긴다는 정치적 발언을 일삼는데 왜 국민들은 촛불집회며 탄핵서명 운동까지 주어 담기 힘들 일을 벌이며 대드는 것일까? 게다가 50% 이상의 국민이 동의한 명실상부한 권력을 말이다.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가 보자, 주위에 10명을 객관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주어 담지 못하는 발언들은 일련의 열공모드와 정보 탐색으로 정리된 합리에 의한 것이 었을 때 다른 10명으로 부터 동의를 구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화법도 중요하고 태도도 중요하지만 다른 10명으로 부터 동의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는 덜 생각하고 덜 정리된 발언과 실천적 삶이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동의를 얻을 수 없었을 뿐이다. 매우 합리적인 상태를 끌고 갈 수 없을 때 우리는 대게 나이를 들먹이고 고향을 들이대고 더 나은 주머니 사정을 토대로 유흥의 길로 유혹하게 된다. 어쨌든 동의는 시켜야 되니까.
이명박 정부는 지난 선거에서 어쨌든 국민의 동의를 얻었다. 경제를 살리고 잘 살게해주겠다는 정치적 발언으로 말이다.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더 이성적이며 합리화된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선거는 합리적인 것 보다는 에너지를 원한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해하는 논리적 시간은 먹고 사는 일상에서 빼내어 누리는 어떤 사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후끈한 에너지가 넘치는 한마디 구호만있다면 어떤 비합리도 용서할 수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경제를 살릴 수도 못사는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는 비합리성에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찾아 낼 수 있는 이상한 정권으로 출범했고 사람들은 이를 기꺼이 축복해주었다. 이은하의 대운하송, 김장훈의 발차기, 송윤아의 시낭송 과 더불어 말이다.
이런 축복이 얼마나 되었다고, 1만명 촛불집회와 1백만명 온라인 탄핵서명 따위에 귀를 귀울이겠는가. 점점 파고 들어가 보니 1만명 집회에 60%가 중고생이었고, 1백만명 탄핵서명 발의 또한 고등학생이 했다질 않나, 정치적 발언과 경찰의 엄포를 적절히 섞고 미국에서 때마침 지원사격을 해주는대다가 그동안 껄끄러웠던 조선일보마저도 괴담 운운하며 몰아 가고 있으니 애들 부침에 너무 나선것은 아닌지 수위 조절을 해도 될 싸움으로 보일 것이다. 투표권도 없고 잉여생산력도 없는 것들이 절반이상 나섰다니 웃기고 자빠질 상황인터다. 조갑제의 말대로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그들의 꼰대들이 용돈으로 통제를 해도 될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사람들은 으례 그랬듯 배후 세력에 조종된 좌파 빨갱이들로 몰아 세우고 집시법으로 몇놈 잡아 넣으면 온라인에서 한두 사람씩 '반성' 이나 '후폭풍' 따위를 거들먹거리며 서로 치고 받다가 '미국산 쇠고기 먹고 보니 싸고 괜찮네' 하며 감사해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로서는 거리에 나온 못살고 야자 빼먹으며 앞으로 경쟁력 떨어질 학생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그들의 구호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비합리적인 노인네와 그들이 섬길 국민은 따로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따라서 예전에 흑인과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었던 코카서스 미국인들의 이성처럼 10대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민주적 결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같은 맥락으로 통일이 되면 안되고 행여 잘못되어 통일이 되더라도 북한 출신에게 민주주의적인 투표권을 주어선 안된다는 생각도 이들에겐 합목적적이다. 이들에겐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어서는 안되는 부류가 따로 있다. 이들의 권력과 권력이 지탱해주는 이들의 자본에 부적격한 낙오된 부류들 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기적처럼 탄핵되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반성해도 절대 잃을 것은 없다. 그들에게 권력은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어떤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나 존경 따위는 더더욱 아니며 누구나 잘살게 하기 위한 호혜평등의 인간성의 정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본을 좀 더 축적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가장 유리한 도구로서 권력이 필요한 것 뿐이다. 애초에 미국산 쇠고기는 국민들이 싸게 사먹을 것이지 돈 있는 정부 관료와 한나라당 인사들이 함께 먹을 고기는 아닌 것이다. 큰 생색 내는 것처럼 미국 쇠고기 자본가들에게 시장 내어 주고 미국 금융시장에 눈치 않보고 호기 좋게 투자해서 돈 좀 만질 수 있으면 이들이 섬기는 부류의 국민들에게 환영 받는 것이다. 광우병 따위로 죽고 사는 문제 또한 시장의 논리로 해결하면 되는 문제다. 이런 시장 논리야 뻔하다. 없는 놈은 먹고 나중에 죽는 논리. 이 정부가 들어야 할 국민의 목소리는 1억짜리 일본산 쇠고기와 마침 가격이 떨어진 미국내 부동산 투자에 관심 있는 부자들의 얘기다.
이들의 관심은 쇠고기와 광우병이 아니다. 미국적 세계화가 가져올 금융의 한결 나은 변화를 예고한 한미FTA 가 그들의 목표다. 돈 냄새는 여기서 나는 것이다. 광우병은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이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에게는 과학적이라는 오래 걸릴 단서를 달아 두면 절대로 그들이 갚을 일이 없는 외상값 같은 것이다. 돈에 밝고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발동한 한미FTA 를 해치면서 까지 외상값을 갚을 부자는 없다. 미국산 쇠고기는 착취해야 할 부류에게 던져주는 당근이다. 돈을 더 찍어 내지 못한다면 못사는 사람들을 모아 그나마 푼돈이라도 글어야 할 판에서 싼 미국산 쇠고기는 그야말로 맛있는 당근 아니겠는가. 그걸 안먹겠다니.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얼마 가지 않아 미국산 쇠고기를 찬양할 것이다. 비합리적인 정권이 들어야 할 국민의 목소리는 명확하다. 돈에 있어서는 명확한 부자들이다. 비합리적인 정권을 선거에서 미친 듯이 뽑아 준 비합리적인 부류들의 목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 어쨌든 궁극에는 마지못해 먹을 수 밖에 없다는 비합리적인 합리화를 감행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오래 걸리는 과학이나 설득하고 이해해야 하는 합리보다 폭발적인 분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불과 1분 거리에서 90여대의 소방차도 끄지 못하는 철옹성이었단다. 숭례문은 탔어도 전시행정은 찬란히 남아 이명박을 위한 귀빈용 소방복과 하이바를 준비해 둔다. 맞다, 어디 속편한 민중이 있겠는가 저런 몰골 따위가 된 '문화재' 라는 것을 보고 말이다. 외주, 하도급 중심으로 비용을 줄이고 관리만 하려는 현대경영의 총아적 마인드는 애초에 윤리나 공공선의 가치관이 없으면 관리 자체가 전시성을 띨 수 밖에 없다. 보여지는 효율성에 집착하고 문제가 생겨도 여러 갈래로 책임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자는 살아 남는다. 이명박은 말한다, 나라 전체가 이런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라고 짐짓 어른인양 훈계를 한다. 하지만 시시비비도 도덕적 관념도 없는 사람의 경영이란 어떻게 해서든 자율적이며 저비용의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최고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것을 널리 퍼트린다, 태안의 저 자원봉사자들을 보라며,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다고 선언한다. 비웃음만 나온다. 댓가 없는 노동의 수혜를 본 자들, 기득권자들, 잘못한 이들의 의기 양양한 지배적 안심일 뿐이다. 노동을 제공한 자는 기름때에 피부가 벗겨지고 호흡이 곤란하다. 이것도 자신의 쥐꼬리만한 의료보험으로 고쳐야 한다. 시시비비가 없는 변호사 몇명의 구라와 방어논리에 동원된 봉사의 매카니즘에 열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명박은 추구한다, 기업이 잘못했으면 자원봉사로 때워줘야 한다고(일명 몸빵이다), 다 한민족 아닌가. 그래, 서울 광장에서 왜 저런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붉은 악마의 관념을 성공적으로 상업화시키질 않았던가. 무모한 열정이 이명박과 같은 무식한 사람, 교양없는 사람을 키워냈다. 또 말한다, 국민이 가슴 아프니 돈을 모아 숭례문을 복원하자고. 조선시대처럼 댓가 없이 부역하라는 말이다. 누가 관리를 잘못해서 이 지경을 해놓았는가? 왜 가슴이 헛헛해서 그 앞에 있는 치과도 다니기 힘든 국민들 주머니를 털어 내려 하는가? 세금은 이런 공공재, 어떤 공공성을 지켜내고 유지하자고 내는 것이지 권력 잡는데 도움되라고 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국민이 가슴 아픈데 왜 성금까지 내야 하는가? 그런 기가 막힌 발상이 어떻게 나오는가? 시시비비를 가리란 말이다, 시시비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의 면책구상이란 이토록 천박하다. 숭례문이고 흥인지문이고 문화재 지키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세금은 꼬박꼬박 잘 낼터이니, 역사에 기록할 시시비비를 따지란 말이다, 이 쪼다들아.
이명박 정부의 정권 인수 작업은 당연하게 받아 들였던 것들의 상실을 경험하게 하는 일련의 반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른바 우파적 개혁의 첫 삽질인 정부조직개편안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무게를 가늠하게 해준다. 이념 우파가 아닌 경제 실용 우파라는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예상대로 효율 중심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효율이 모든 사회 가치에 긍정적 발효를 도울 수 있다는 언어 자체의 도단으로 인해 우리는 효율적이면 모두 좋다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효율은 모든 작동의 기름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제 성장만 된다면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던 괜찮다는 기계적 성장론에 빠진 이유도 효율과 같은 자본주의의 메카니즘만을 신봉할 뿐 좀 더 근원적 가치에 질문을 던지는 토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안의 근저에는 대게의 민중이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공무원의 철밥통과 복지부동의 오만한 자세도 실용적으로 바꾸겠다는 일종의 외과적 복수를 깔아 여론의 동의를 얻겠다는 계산이 있는 듯 하다. 다만, 이러한 복수심으로 정부조직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근원적인 질문이나 담론으로 다뤄지지 않을 몇가지 중대 미래가 없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은 기우일까.
먼저, 통일부의 문제는 통일을 외교와 같은 대외적 관점으로 전환시키는 일대 사변에 가깝다. 즉 이념적 보수가 아니어도 통일은 이제 민족적 문제가 아니라는 실용적 관점이다. 사업이 되면 하고 사업이 안되면 파기하는 기업의 관점이 통일을 간단히 수술해낸 것이다. 통일회의론은 이미 유행처럼 번져서 세대를 불문하고 통일이 줄 모순의 파괴가 폭넓게 두려움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부조리를 운동적으로 계몽해내지 못한 지식인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통일은 되기 전에도 되고 나서도 여전히 대내적 관점이어야 한다.
교육은 인재라는 재료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버렸다. 이것은 이미 교육을 버린 이명박 당선자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도 그 맥락을 찾아 볼 수 있을만큼 명백하다. 기준을 두지 않아야 하는 교육과는 달리 인재는 기준을 통한 인력 관리 체계로의 전환이라 봐야 한다. 인재의 기준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계급의 분리다. 이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사교육비 완화를 총론으로 한 자사고의 추가 설립 등의 공약은 허구라는 점이 입증된다. 그야말로 인재가 엘리트가 아니고서야 성립이 되지 않는 교육은 엘리트가 되기 위한 맹렬한 경쟁이 아니라 이미 출신성분으로 계급을 갈라 놓고 심각한 소통 불능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악랄한 철학이 설치된 것이다.
지식경제는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과학기술은 그 중요함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만 과학이 신화가 되었던 황우석 사건을 통해 과학을 더욱 경제적 부류에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자연과학부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자원도 경제적 성장과 에너지 구상의 개발건설의 취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환경과 조화로운 자원의 활용과 보존의 관점으로 진보되어야 할 것이 주문되어 환경부가 주축이 된 환경자원부로 통합 되었다면 그나마 덜 코미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효율과 실용적 관점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효율과 실용이 모든 근원적 문제를 진단해서는 안된다. 실용적 관점에서의 상실은 물질의 유무와 시장의 가치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물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악랄한 파괴와 상실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권력과 시장 원리로만 미쳐 돌아가는 모순과 어둠의 세상일 수록 인간정신의 근원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러한 소임 마저도 종말을 선언하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이미 반노동, 반민중적인 사고로 신자유주의 노선에 동참할 사람이었다. 일찍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노조 분할과 갈등을 통해 민주노총의 농촌마인드를 비난했던 한국노총이었다. 노사정 합의에 있어서도 사측과 정부의 안을 수용하고 민주노총을 이른바 따 시킨 것도 이용득 위원장의 정치적 발로 였다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안다.
그가 이명박과 호기 좋게 손을 잡았다고 해서 놀라울 일도 아니다. 두 사람 다 정책이 관점을 바꾼다는 짧고 얄팍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들의 특징은 총론은 거창한데 각론은 형편 없는 열거를 주장하거나 총론을 목적하지 않는 각론을 늘어 놓고 선전하기 바쁜 부류들이다. 피지배자는 대게가 정책과 시스템을 통해 관점이 바뀐다. 하지만 지배자나 지도자는 관점을 통해 정책을 수립하고 관점을 현실화 시킨다. 이명박과 이용득이 악랄한 이유는 지도자이면서 절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관점과 교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도자인척 한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을 전폭적으로 지지 하거나 최소한 지지할 곳이 없어 남들이 지지 한다며 안락한 비판적 지지의 대열에 서거나 이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민중이 대다수라는 현실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공포스러울만치 처절한 현실이다. 검찰이 BBK 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여론조사 1위 후보는 기소하지 못한다는 정치석 해석을 한 것 뿐이라며 신당은 결국 현직 검사의 탄핵소추를 감행했다. 어쨌던 검찰에는 일고의 믿음이나 인간적 측은함을 보낼 생각이 없다. 그들의 알량한 조직적 자부심이 오늘날 한국사회에 미친 해로움은 회복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5년에 한번씩 바뀌는 대통령이야 죽도록 해먹지 못하는 것이지만 검찰 조직의 해악은 작금의 차원을 넘어 선다. 이 해악의 요지가 현실을 파탄 낸 세력의 주둥아리로 부터 나왔다고 해도 여론조사 1위인 유력한 대선 후보를 기소할 수 없어 수사를 엉터리로 했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긴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검찰의 정치적 해석도 여론조사 1위인 후보에서 나왔고, 한국노총의 자기 계급의 정체성 부정도 관점의 존경어린 동질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력 후보에 대한 반동적 줄서기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맥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은 총론은 같은데 각론이 다른 집단간에 낮은 단위로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어쨌든 현실이다. 온갖 비리와 도덕적 파탄을 동원해도 부동의 1위 후보를 만든 것도 민중이며 정체성 부정이 오늘날 참여정부의 가장 치졸한 실패라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급적 연대를 구축하여 스스로 일어서길 냉소하고 남의 부스러기를 주어 담는 거지근성에 복무하기로 한 것도 민중이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실패한 민주노동당의 어려움은 반동적 민중과 진보라고 주장하는 반진보적 개혁세력으로 부터 잉태되었다. 주장하건데, 잃어 버린 10년은 잃어 버린 경제가 아니라 잃어 버린 진보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노무현, 정동영으로 이어지는 반진보세력은 개혁이란 비슷한 레토릭으로 현실 이반질을 해대며 2002년의 단일화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지근성과 비리에 내성된 민중을 만들어 낸 것도 10년간 반진보세력이면서 범진보인양 허튼 정치적 선전을 한 결과다. 10년간 부정된 진보로 인해 난치정체병에 시달린 민중들이 병에서 벗어나 안락함으로 복귀하고 싶은 심정은 당연하다. 차라리 경제라도 살려라 떡부스러기라도 커지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 중산층도 기대할 수 없는 노동자와 농민과 시장상인들이 이명박을 찍는 이 단순 명쾌한 이유를 밥벌이가 숭고한 대게의 사람들끼리 무턱대고 탓할 수 있나. 하지만,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향한 이합집산에 정체성 따위는 없다고 해서 부자건 가난하건 보수건 진보건 간에 권력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각론에 매달릴 때, 사회가 더 좋아지려는 총론은 한낫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민중을 위한 총론을 얻을 수 없는 사회는 조금도 좋아지거나 진보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호주머니 타령만 하다가 사회적 시스템은 기득권의 관점과 논리로만 지배당할 것이 불 보듯 하다. 자기 호주머니 걱정만 하는데도 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검찰이 1위 후보라서 기소하지 못한 이유와 한국노총이 1위 후보를 지지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릴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다. 고통도 우리가 받아야 하고 아이들에게 물려 주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총론과 각론이 들어 맞지 않게 변명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두렵지 않은가? 이런 현실이 공포가 아니면 무엇이 공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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