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3번 입니다.

2008/04/08 14:40 / 생각




2008/04/08 14:40 2008/04/08 14:40
DrunkenSTAR 이 작성.

투표란?

2008/04/08 02:18 / 생각
"민생이 바뀝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대표 표어다. 이 정당에 투표하면 민생은 변할 것인가? 내 생각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봐라, 정당정치의 진정성은 없고 살리지도 못할 경제에 내몰린 다수결만 붙들고 있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이 정당의 공동대표 2명이 지역구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것 같은가? 좀 더 거들어서 정당지지도를 높혀 비례대표로 한 두석 더 얻는다고 치자, 원내 4명이서 민생을 바꾸겠다고? 295 의 다수결은 어떻하고? 절대 그들이 원하는 지속 가능하고 좋은 민생으로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바꿀 수 있는 곳에 투표하는 것이 맞겠다.

1000만원 등록금 때문에 격년으로 휴학하고 GS25 에서 날밤까는 아들, 딸을 위해 재산 100억 신고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면 언젠가는 연소득 4만불 된다고 하니 그곳에 투표하면 된다. GS25 의 시급이 터무니 없이 쥐꼬리 같다면 대운하 착공을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행여 백골단에 쫓길지도 모를 어느 비정규직 보다 잡무에 시급이 짭짤할 수 있으니 말이다. 투표장 인근에서 삽 하나씩 사가지고 오는 센스를 발휘하시길. 게다가 장기 근무할까봐 대운하 공사 기간을 숨기고 있는데 몇몇 좌파 빨갱이 교수며 지식인들이 10년도 더 걸릴수도 있다고 하니 이번에 한번 인생 올인해보는 것도 한 방법, 인생 모 있어, 한방이지. 볼따귀 살짝 꼬집었다고 말만한 처녀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성희롱이라고 소리치는 세상 말이다, 우리 나라 축구 살리려고 세상 곳곳에서 폭탄주 마시느라 노인정에서 할머니들하고 놀아주는 것도 힘든 양반 간쪼그라들게 만드는 미친X 없는 세상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당당하게 대낮엔 아무 볼이나 꼬집고 어두워지면 아무 젖가슴이나 주물럭 거려도 되는 성개방된 세상 만들 수 있는 곳에 투표하면 된다. 어디 이것 뿐인가, 시장경제주의, 비즈니스 프랜들리는 죄다 재래시장 경기 살리자는 말 아니던가, 이렇게까지 재래시장을 위해주던 사람들이 또 어디 있었던가, 떡볶이 장사도 비즈니스이니 곧 3만원짜리 꼬리곰탕이 아니라 떡볶이가 청와대 점심만찬 공식 메뉴로 등장할 신명나는 세상이 될터이니 그곳에 투표하면 된다. 교육이 이렇게 된 건 죄다 양심에 털난 노빠들 때문이다. 개념 있는 대학에 자율을 주고 애들을 경쟁시켜야지 평준화시켜서는 안된다. 애들이 이렇게 공부를 안하는 건 순전히 평준화 때문인데다가 라이벌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거다. 조지게 패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되는데 학교는 학원보다 느긋하다. 사람은 어느 대학 가느냐에 따라 그게 사람될 놈인지 짐승될 놈인지 아는 거다. 공부하다 죽는 애들도 없는데 어륀지나 가져다 주고 죽도록 문제집 풀게 만들 수 있는, 그곳에 투표하면 된다. 이도 저도 싫으면 정치를 개그의 한 장르로 승화시킨 위대한 분들이 연대한 곳에 투표하는 것도 한 방법. 이분들 덕택에 곧 '여당', '야당' 이란 당 이름도 등장할 듯.

사표란 무엇인가?
제 처지를 모르고 찍어 대는 양심의 개털.
2008/04/08 02:18 2008/04/08 02:18
DrunkenSTAR 이 작성.

오늘날 희망이란 단어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는데다가 희망이 언어의 범주와 슬며시 이별하여 '희망' 이란 단어가 있었지? 추억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될 지경이다. 이쯤되면 분노는 세련됨을 잃고 거칠어진다. 이념따위로 무장한 논리도 희망이란 엔돌핀이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을 돌아 다닐 수 있을 때 하는 얘기다.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가 방어하고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우리보다 더한 정치상황을 빗대어 제사회가 그것보다 덜하니 더 참고 더 견뎌야 한다는 논리는 그럴싸 하지도 않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희망' 자체가 어려워졌으며 희망이 지닌 무궁한 범주 또한 좁아져 버렸다. 대박을 쫓고 대박만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절망은 희망보다 쉽고 더 깊어졌다.

제로섬 게임인 자본주의에서 확률적으로도 대박은 1%안에서도 이뤄지기 힘든 우연이지만 이를 쫓는 99%에게는 언제부터인가 희망보다 절망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가 되버렸다. 현대사회는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관념적 단어가 디테일해진다. 예컨데, 14조원의 무역수지 흑자는 19조원의 해외펀드 손실액이 날려 버렸다는 식으로 디테일한 절망이 우리의 관념적 희망마저 날려버리는 것이다.

마치 더 견뎌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빼앗아 와야 한다. 자본주의는 제로섬 게임이다. 한국은행에서 돈을 따오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정책입안자들은 민중이 절망에 접근하는 매우 일반적인 경로를 시스템으로 깨줘야 한다. 우리는 다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좀 더 경쟁하여 빼앗아 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책임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계몽하고 선동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제는 고소영, 강부자, 명계남으로 코미디된 정권의 도덕적 상식적 무소유를 복기하는 일도 지겹다. 어물어물 하다 국가가 바뀌었고 지속가능한 '나은 삶' 의 열망 또한 금기시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스스로 5년동안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자 하는데 더 이상 무엇을 말리고 저항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 또한 절망에 쉽게 방점을 찍어 버리고 냉소하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도 바람은 분다. 옥탑 위에 빤스를 널던 여자가 혼잣말 한다. 오늘 빨래 잘 마르겠다고.. 문득, 서럽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서러워서 살아야 하는 실존이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집안에 묵혀 두었던 빤스를 빨아 널어 보려 한다. 나은 삶에 대한 기대는 잠시 접어 두고 서러워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말려 보자.. 참여연대 회원으로 진보신당 당원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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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3 14:53 2008/04/03 14:53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