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없는 미소

2006/03/14 18:34 / 사진
봄이 바람의 언덕을 넘었건만,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 그대 처럼 봄꽃 같은 미소를 낼 수 있는 것인가?
파타야에서 소외와 멸시을 넘어 온 짠한 봄을 보았다. 한 세상, 우리가 머무는 모양이 고작 여성 아니면 남성인데, 되어야 하는 것 되지 못하던 그대는 얼마나 추웠던가. 비록 지금은 양지의 무대에서 성가신 호기심이 열광이 되었다가 이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시들어 버리면, 그대로 그 외로움이 여성이면 어떻고 남성이면 어떠랴, 누구라도 곁에 있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어떠랴.


내 온기로 너를 품어 여직 내가 살아 있는 줄 알아, 가슴 켠을 열어보니 내 온기는 심장 가장자리에 겨우 보이는 작은 불씨, 내 가슴 덮히기에도 모자랐다. 그동안 너는 얼마나 추웠는가...





[태국, 파타야, 알카자쇼극장]
2006/03/14 18:34 2006/03/14 18:34
DrunkenSTAR 이 작성.

이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게이 영화가 아니라 러브 스토리라고 말했다. 애니스와 잭의 러브 스토리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성급하지만, 게이의 사랑이라 하면 대번에 동물적이거나 퇴폐로 이어 부치는 것과 다른 사랑을 나눈다. 영화가 카메라의 시선으로 말 한다면, 이 영화의 화자는 애니스도 잭도 아닌, 브로크백 마운틴 그 자체이다. 인간과 인간의 감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결여되어 있을 뿐,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감정의 참된 의미를 찬찬히 그리고 관조적인 만년설로 응시한다.


'게이의 사랑은 금기' 라는 담론에서 무엇으로 부터 인지, 누구로 부터 인지 모를 금기는 영 개운치 않다. 게다가, 게이의 금기에 대해 뿌리 깊은 담론은 인정하면서 인간 감정의 보편성에도 동시에 감동하는 것은 영 모를 일이다.(이점에서 이안 감독이 '브로크백 마운틴은 게이의 러브 스토리다' 고 명확히 선언해주기를 바랬다. 사람들은 아직 게이의 사회성과 사랑의 감정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가 제목은 거반 게이성임에도 권력에 관한 내용이라며 한발 물러서서 평가 받기를 바라는 속내와 같을 테지만.)


사랑이라는 맨탈을 배제하고 육체적이며 직접적인 정체성의 모양으로 보자면, 남성의 모습으로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 브로크백 마운틴적 사랑과 남성이었다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여성의 모습을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처럼 보인다. 대상이 어떤 행위를 하는 익숙함에 의한다면 남성이 남성과 나누는 육체의 정열적인 감각은 금기의 테두리에서 변태와 모멸로 취급 받는다. 하지만, 남성이었으나 현재는 여성의 모양을 한 남성과 남성의 그것은 마땅치는 않지만, 변태까지는 가지 않는다. 경험론적인 상상력은 이렇게 취약한 변별력을 가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성과 남성의 육체 행위를 보았단 말인가? 단지, 자신이 이성과 가진 육체적 사랑 행위, 그 경험을 기초로 한 동성과의 행위, 그에 따라 각자 다른 수위로 가지고 있는 비위의 세기만으로 그 사랑의 의미를 고작 변태며 모멸감으로 몰아 가지 않았던가? 알 수 없다, 그러고도 왕의 남자에 자그마치 천이백만명이 몰리고, 브로크백 마운틴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He was a friend of mine 을 들으며 거부감은 커녕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이쯤에서, 멜로에 감격도 하지 말란 말인가? 라 말할 수 있다. 감격할 수 있다, 그러나 감격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하다고 생각했던 게이의 사랑이 실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아름다운 초원 뿐만 아니라, 동시상영 극장 화장실에서도 그 사랑은 존재한다.
2006/03/13 22:12 2006/03/13 22:12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