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있는 시간 끝에 꿈을 이뤘다고 치자. 모든 꿈의 이룸은 기득권이 된다. 누구나 이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한다.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 꿈을 이뤘으니 이제 그 꿈을 버려라, 너를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후천적인 본능이 된다. 어떻게 이룬 건데 버린다는 건 말이 안된다. 우리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책임이란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책임지고 뭘 하겠다, 책임 져라 따위의 말을 수없이 많이 듣는다. 이 언어의 정치적 감수성 때문에 무책임이 책임인 등식이 성립되는 일들도 한 없이 목도했다. 좌우간 책임은 현상의 귀속이고 자유로운 인격의 결정이다. 청춘들의 꿈이나 어른들의 꿈이나 매한가지로 사회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것에서의 획득, 돈이거나 위치이거나, 이기 때문에 책임을 가장 가시적인 돈이나 위치의 변동으로만 얘기한다. 현상의 귀속이 사람에게 되어야 하는 것이 보편적일지 모르나 책임의 형태가 반드시 돈이나 거취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는 참으로 엥똘레랑스 하다. 인격이 그 둘을 합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책임을 다 져가면서 인격을 실현하는 양심을 부여 잡고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조금씩 악을 행하며 거대한 행복을 추구한다. 누구나 세상을 민망하게 살아 간다. 특히나 책임을 어떤 제도로 구속하고 그 안에서 기득권이 추구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민망함은 우리의 모습으로 일반화하여 쓰기에는 너무 구리고 상스럽다. 언어도 현상도 스스로에게 귀속시켜 본적이 없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기득권이 수성되는 방식을 배웠다. 나아가 저것이 정치 라는 왜곡도 서슴치 않는다. 그로 인해 우리에겐 면역이 생겼다. 아울러 그 유전자가 세계의 어느 곳에 있든, 재미교포건 재일교포건 상관 없이 같은 진화성을 품고 퍼진다. 꿈? 시간이 걸릴 뿐 다시 꿀 수 있다. 버림을 당하면 당했지 이룬 꿈인 기득권을 버려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책임지며 살아 가는 법 대신 그것이 무엇이든 한번 얻은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며 살아 왔다. 다시 꿈 꾸기 위해 새로운 독을 마실 시간을 떠올리면 심장이 저절로 떨린다. 소박한 꿈은 그야말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없는 꿈일 뿐이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지향만 하는 꿈이 사실 행복인데도 우리는 그런 꿈을 꿈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어떤 교환가치적 인정을 받을 수 없고 민망해 할 필요도 없으니까.
재범이 한국, 한국인을 욕한 것 그것도 그의 인격이었다. 게다가 그의 인격이 리더로서 민망하고 그 발언 자체도 잘못이었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두말 않고 격한 청소년의 감정 처럼 시원하게 떠났다. 어떤 이는 그는 계약기간도 남아 있고, 반드시 복귀한다, 그게 시나리오다 라고 한다. 회사차원에서 잠수 좀 타라는 조폭스러운 감수성에 기대어 결과적으론 동정이 될 여론에 줄서 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른들의 애국심 같은 것에 호들갑을 떨어 봤자 아마 이건 극복 안될꺼야, 냉소하고 만다. 그가 복귀하는 시점까지의 시간 동안 그가 치룰 개인적인 고통 또한 낡아 빠진 타인의 고통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다만, 민망하게 사는 어른들의 그 자랑스러운 민망함이 도무지 이해가 안될 뿐이다. 그것이 정의 인양 행복인양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척박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오늘 나의 호주머니속으로 들어온 돈은 누군가의 피다. 누군가의 피로 우리 스스로의 살을 찌우는 삶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미안해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독을 마셔야 하고 소박한 꿈을 지향하는 것에 슬퍼해야 하고 감당하지 못할 삶을 강요 당하는 아이며 어른들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젊은이 하나가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는데 여러 생각이 든다. 왜일까... 부엉이 바위도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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