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기륭전자

2008/08/10 16:56 / 생각
현지는 이제 5.8킬로, 2.49킬로로 태어나 백일이 지났다. 제 양껏 먹고 잘 자고 일어나면 베냇짓으로 아빠의 간장을 녹인다. 어느 날 현지가 제 양껏 먹어야 할 것을 거부 한다면 나는 어떨까? 제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그 이유가 해소될 때까지 먹는 것을 거부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안먹으면 죽는다. 아마도 혈당이 감소하여 심장기능이 저하되는 심부전이 일어나고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하나 보다. 서서히 죽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온갖 고통이 서서히 스며 들 것이다. 보는 기능을 상실한 눈으로 그 이유와 헛것을 번갈아 교차시키는 끔찍함으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어느 아비가 제 자식이 먹기를 거부하며 이런 고통을 감당하려는 것을 담담히 지켜 볼 수 있을까. 또는 어느 자식이 제 아비가 먹기를 거부하는 사태에 저는 살겠다고 온전히 먹기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밥상머리에 같이 앉는 것이 식구 인데 제 식구가 먹지 않는 것을 보며 견디는 것은 먹지 않는 것처럼 기적적인 일이다. 일부러 먹지 않는 일은 자살과도 같은 일이다. 다이어트? 이것도 일종의 자의식이다. 자살로 실존을 증명하듯, 살면서 타인의 증명을 통해 실존하려는 다이어트도 충분히 자의식이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해야만 하는 주변의식과 먹기를 거부하려는 자의식이 합쳐진 의지를 다이어트라고 부르진 않는다.

단식,
1983년 김영삼의 단식투쟁 부터 단식은 저항의 한 상징이 되었다. 물론, 단밭빵 먹으며 단식 했다는 가십은 집어 치우더라도 3당 통합으로 단식을 다이어트로 끌어 내린 학실한 장본인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저항과 투쟁에는 단식이 단골 메뉴다. 마치 밥 먹듯 단식 한다는 말처럼. 민주화 이후에 투쟁을 위한 단식은 사라질 줄 알았다. 아니, 십장의 뇌와 디젤 불도저의 신체로 무장한 2008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사라져야 할 미국산 쇠고기 메뉴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값싸며 품질 좋은 쇠고기를 먹으며 황제 다이어트를 할 것 같은 나라에서 단식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의 얘기 같다. 아무도 단식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KBS 에 경찰이 진입하여 농성 중인 직원들을 강제 연행하고 불법적인 이사회를 강행했어도 KBS 는 온전히 올림픽 방송 중이다. 사람들은 "KBS 에 경찰 난입" 을 안드로메다에서 발사된 알 듯 모를 듯한 코드로 인식한다. 현대사회에서 주목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짜라고 인식된다. 단식, 그야말로 밥 먹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른다. 고로 가짜다. 조중동에서는 KBS 에 경찰은 난입하지 않았다. 이명박과 최시중의 위대한 국가 경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뿐이다. KBS 노조가 뒤늦게 투쟁! 삭발을 제 아무리 해도 그건 가짜다. 주목 받지 못한다.

기륭전자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은 58일동안 단식 중인데도 주목하는 사람은 적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사실에 입각해서 주장한다고? 기륭전자의 기업가치와 이익,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세계적 경쟁력은 진짜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58일간의 단식은 가짜일까? 어떤 것이 사실일까. 자의적 사실은 모두 가치적일 수 밖에 없다. 기업이익을 위해 비정규 노동자 몇명은 굶어 죽어도 되는 가치, 굶어 죽는 고통의 문턱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지는 비정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노동으로서의 가치, 무엇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진짜가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제 밥그릇 찾으려고 저런다고 한다, 그렇다, 제 밥그릇과 자의식과 주변의식과 제 식구들 챙기려고 58일동안 단식한다. 최소한 다른 밥그릇 찾아서 그 밥그릇을 차지해야 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시도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각성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그 예의의 댓가로 58일 단식이라는 처절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해야만 가치를 가지는 민주주의 잔인함과 맥락이 닿아 있다. 박태환의 4년, 체중조절에 실패한 유도의 최민호의 4년은 기억해도 기륭전자 노조원의 1000일, 58일간의 단식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것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체육관에 모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립해 있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워 하는 이 몇분의 순간은 감동적이다. 박태환 자신에겐 매우 큰 영광이며 노력의 댓가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 순간의 감동일 뿐 우리의 사회적 삶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것은 국가와 스포츠, 범세계적인 올림픽이 만들어낸 가짜다. 진짜는 우리의 삶에 끝까지 영향을 미칠 진지한 사회적 현안의 접근에 있다. 기륭전자 노동자가 만들어 낸 1000일과 58일간의 단식, 이 잔인함과 처절함에 접근하는 것이 우리 삶에 자양되는 진짜 사실이다.

단식 투쟁을 지지 한다고? 이것은 다이어트가 아니다. 단식 투쟁 지지는 죽음에 대한 지지를 도모하는 것으로 말도 안되는 잔인함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언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폐에 물이 차 죽어간다. 왜? 이 뙤악볕에 폐에 물을 채워 죽어 가야만 하는가. 저들은 죽어 간다, 그리고 죽는다. 명백한 사회적 죽음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이상 연민따위도 느끼지 못하는 갈 때까지 간 잔인한 우리 사회의 방치다.
2008/08/10 16:56 2008/08/10 16:56
DrunkenSTAR 이 작성.

나의 투쟁

2008/05/28 15:30 / 생각
몇 달 전부터 내가 사는 아파트는 간판을 바꿔다느라 분주하다. 입주 당시의 아파트 브랜드를 새로운 아파트 브랜드로 바꾸는 작업이다. 이일을 하는데 입주자대표회의와 조합은 입주민들에게 부당한 동의서를 요구했다. 신규 브랜드로 교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간판 변경과 기타 도색작업 등이 필요한데 이에 필요한 비용을 평수별로 분담금을 부과한 것이다. 이 분담금을 내지 않을시는 소유재산에 법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협박도 일삼는다. 나는 이런 독소 조항이 있는 동의서를 거부했다. 하지만 주민 80%는 자신들의 재산이 브랜드를 바꿔달아 자산가치가 증대할 것이란 희망으로 동의서에 서명을 했고 서둘러 분담금을 입금하고 있다. 독소 조항도 독소 조항이지만 아파트 간판만 바꾼다고 그 브랜드의 상업적 가치가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 아닐진대 너도나도 포장을 바꾸는데 혈안이다. 누군가는 손쉽게 자기집을 구입했을지는 몰라도 대게의 사람들은 지리한 현실과 꿈 같은 꿈으로 어렵게 자기 집 한칸을 마련한다. 이마저도 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사람축에 든다. 그런 집은 브랜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식구가 안전하게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갑작스럽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오래도록 삶을 영위하는 공간으로서 중요하다. 그러한 공간에 건설회사의 상업적 브랜드는 그 안의 고귀한 삶에 어떠한 간섭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파트가 집이 아니라 상업적 가치의 브랜드화 되면서 집이라는 인간적 의미를 쉽게 팔아 먹어 버린다. 그 집에 제식구가 브랜드와 관계 없이 행복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식은 브랜드로 행복을 찾는다. 하지만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 브랜드의 개명은 이 아파트를 사고자 하는 다른 수요자에 어필하여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치를 받아 챙기기 위한 수단이란 점에서 간판을 바꾸고 도색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사는 사람의 삶이 윤택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80%의 이런 선량한 상업적 식민들이 있기에 그것을 등에 업은 조합이나 대표회의는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소수자들에게 온갖 악랄한 횡포를 일삼는다. 이권만을 쫒는 조합에는 이성이나 양심, 인간의 영혼따위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다수결을 민주주의로 믿는 무식한 폭력만이 존재한다. 나는 걱정이다, 저런 아비와 어미에게서 자란 아이의 장래가 결코 인간적이지 않을 것이기에 두렵다. 이미 이 상업적 세대는 계몽이나 반성이 불가능하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가난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남들이 해놓은 것을 받아 먹으며 기생하며 이권을 챙긴 사회암적 세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을 믿는 사람들이 80% 이며, 우리나라의 법철학은 다수결 중심적이다. 즉, 반대해도 할 수 없다. 다수가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고 다수가 하자고 하면 따를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다. 우리나라의 법은 애초에 약자나 소수자를 보호할 의지나 근거가 없는 강자의 철학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하다 보니 80% 정도의 상업적 동의는 법적으로 유의미하다. 법적으로 말이다.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법적 근거로서 말이다.

나는 이 80%에 주목한다. 이 80%는 우리 사회의 도처에 존재하는 80% 다. 이 80%는 사회전체적으로 약자이면서 미래에 강자가 되고 싶은 헛된 희망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분포와 같다. 제 아이가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것이 안타깝지만, 자신의 아이가 똑똑하다고 믿고 싶고 게다가 MB식 성공까지 보장 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짐짓 현실직시한 양 행동하는 사람들의 분포다. 자신들의 욕망이 아이를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이 되는 부모 됨됨이의 왜곡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분포다.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정책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도 이명박의 자사고 정책이나 서열화 따위는 궁극적으로 인정하는, 즉 자신의 아이는 똑똑하고 남들보다 앞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학교가 필요하다고 믿는 이명박 지지자들의 분포다. 이제 이런 80% 와 홀로 수개월동안 대치하고 나니 너무 피곤하다. 이 80%는 분담금을 내지 않는 소수가 자신들의 분담금으로 도색한 브랜드의 가치를 분담 없이 취하려 한다고 난리인 분포다. 그래서 법적으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 선다. 법은 어차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종사하는 교양 없는 자본 식민들의 편에서 이해 못할 용어들을 쏟아 낼 것이다. 우리 사회를 좀 더 신중히 대하려 해도 그런 이성이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곳인지 매우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방금 전 강남경찰서로 어제 촛불문화제에서 강제연행된 후배를 면회 갔다 왔다. 면회를 거부 당했지만, 먼저 면회한 사람들의 전언으로는 '48시간 자고 나올테니 걱정말라' 는 것이다. 미국산쇠고기 수입 반대해서 혼자서만 그거 안먹겠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이라 생각하는 몰지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고 싶지만, 우리 사회의 80%는 20%의 희생으로 나중에 생길 이권을 취하거나 이롭게 바뀐 사회현상을 공기처럼 거저 마실 사람들이다. 나는 이 후배와 또 강제로 자발적으로 연행당한 사람들의 활동만큼 동참을 하지 못했고, 그런 부실한 오지랖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저 마실 사람으로 남아서는 안된다. 최소한 이 사회를 같이 살아 갈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마저도 하지 못하면 짐짓 양식있는 양 행동하며 브랜드만 갈아 치우는 일에 열중인 이명박 지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교양으로 아이를 키워 세상으로 내보내면 내 욕망의 성공신화가 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기는 죽어도 싫다.
2008/05/28 15:30 2008/05/28 15:30
DrunkenSTAR 이 작성.

대추리에서

2006/04/17 20:20 / 사진
그 논두렁에서 붉은 석양이
어깨에 짊어 진 삽얼굴까지 붉은 물을 들여
뚝뚝 떨어 질 때,
왠지 재수 좋은 기분이 드는 저녁이면
먹는 풋고추는 유난히 맵고
아직 일손 놓지 않은 아버지 콧등에
솟은 땀 냄새까지 나는 날.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은하수 떨어지는 소리까지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은 작은 동네였습니다,
담도 없는 대추리는, 그랬습니다.



이어지는 대추리에서..



대추리 바로 알기(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2006/04/17 20:20 2006/04/17 20:20
DrunkenSTAR 이 작성.

자본교환적 존재

2006/03/29 13:02 / 생각
KTX 가 아무리 시간 혁명을 주도하고, 에어버스 A380 이 무려 555명에 달하는 손님을 한꺼번에 유럽과 미주로 실어 나른다 해도 다른 곳의 일은 다른 곳의 일이 됩니다. 적당한 이기심은 나한테, 내 집에서, 내 식구한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면 그 시공간이 어찌됐든 내일처럼 간주해주지는 않지요. 이기심을 적당히 접고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니다 보면, 이렇게 바쁜 세상에 네 앞가림이나 하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목하 토익과 고시에 매달린 학생들, 염려는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2월27일 단의원이 울고불고 저항해도 어쩔수 없었던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시끄럽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요즘 학생들 조용합니다.조용한 걸 보면, 내일이 아니라는 도그마가 팽배한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한 대기업이 특정 학교 학생들 뽑지 않겠다(K대학교 던가요?)루머를 흘리면 요즘 학생들 금새 풀이 죽습니다.(기업이 학문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취업이 무섭긴 무섭나 봅니다. 그렇지요, 생존의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비정규직 법안이야 말로 그대들의 생존과 직결하는 법적 장치인데도 내일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봅니다. 설마, 토익과 고시에 열심히 매달린 본인들이 비정규직은 되지 않을 거라 근거 없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초고용계약법에 대한 프랑스 학생들의 저항을 보며, 합리적 관리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투쟁적 관심이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민주주의의 의식과 행동의 선두에는 실천지식인으로써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엔 기업논리를 강조하는 짝퉁 개혁진보세력들이 강철대오를 짜 놓았습니다. 그 대오에는 통계적 방식의 진보, 합법성을 가장한 기득권의 수성이 있을 뿐, 노동의 신성함은 없습니다.


이제 학생들은 의식을 배우지 않나 봅니다. 의식은 고전, 토익은 미래가 된 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천박한 무리들이 사회와 제도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상업주의의 중금속이 이제 천천히 학생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을 중독시키고 있습니다. 모두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지한 성찰은 하지 않고 '돈이나 벌지'라며 체념을 하고 맙니다.


우리의 비정규직법안은 지금 학생들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취업준비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자신이 무엇인지,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사고해보지 않고 제도권으로 쓰며드는 것은 자본주의가 원하는 자본교환적 피의 수혈 입니다. 그것도 2년 단위로 쪼개서 말입니다. (정체성은 사회가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대다수가 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록 정체성과는 멀어집니다.)


그러한 비정규직법안이 날치기로 통과 되어도 전혀 불쾌함 없이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기성세대의 자발적 복종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썩었습니다. KTX 승무원의 파업으로 왜 내가 불편해야 하는지 푸념하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대통령이 나서서 제도며 인프라를 왜곡해가며 인간성을 실추해 놓고 자신감 운운하는 반 칸트적인 선언을 일삼는 사회에서 특별히 깨우쳐야 하는 의식은 기대하지 못할지언정, 현안을 제대로 보는 교양 정도는 갖추고 나이는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2006/03/29 13:02 2006/03/29 13:02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