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이 망해 먹을 사회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겠다고 도시근로를 하고 있는 나에게 밤은 늘어지게 누워 손가락으로 리모콘이나 작동시키다가 자는 게 대부분이지만 소중한 휴식 시간이라오. 그러하니 앞으로는 역겨워 도저히 두고 봐 줄 수 없는 견해(조선일보 시론)를 세상에 밝히지 않아 주었으면 싶소. 일찍 자고 쉬고 싶소. 아무리 볼테르처럼 똘레랑스를 해보려고 해도 당신의 견해는 교수치고 변호사치고는 너무 구리오.

일단 내 정치적 스탠스는 참여연대 시민위원, 진보신당 당원이오. 당신들의 업자 용어로는 빨갱이라고 하지요. 빨갱이, 헌데 나는 여러 차례 이 누추한 블로그를 통해 내 태생적 한계에 대해서 말하곤 했듯이 빨개지려고 노력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겠소.

내가 하도 바빠서, 막말로 환율 오르고 유가 오르고 주식 떨어지는데도 죽어라고 바쁘오, 9월8일 참여연대 후원의 밤에는 참석하지 못했소. 그나마 한 10만원쯤 후원해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좌이체도 못시켰다오. 시민단체가 돈이 없다는 통념과 달리 40억원이나 되는 빌딩을 지었으니 무슨 돈으로 지었는지 질문하는 사람이 많을 터라고 했는데 그렇소, 많이 질문들 하시오. 14년동안 근검절약해서 모은 돈, 보금자리 후원을 통해 추가적으로 후원 받은 돈, 은행융자 이렇게 해서 지었소. 왜 지었냐고요? 집주인 눈치 보며 시민운동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닙디다, 게다가 운동을 하려면 연대를 해야 하는데 그런 연대의 근거지를 만드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고 앞으로 100년동안 쓸 집으로 생각하고 무지 무리해서 걍 지어버렸소. 시민단체는 돈이 없다는 통념? 이게 통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럼 조선일보는 돈 많다는 통념도 성립이 되는 것이오? 법률가라면 논리로 살아야지 통밥으로 살면 되겠소? 그럼 그 통념부터 얘기해 봅시다. 시민단체 돈 없소, 그래서 시민단체 상근자들 급여는 가히 살인적이오. 노동 강도로만 급여를 받는다면 시민단체 상근자는 당신보다 많이 받아야 할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당신 같은 기득권 세력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오. 뭐 그것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소. 나는 당신 같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돈 없는 시민단체도 후원하고 시민단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가지고 힘이 좀 나는 날이면 손수 참여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오. 물론, 당신이 뉴라이트 계열의 시민단체에서 그런 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오. 만약 그렇다면 뉴라이트 계열의 시민단체는 돈이 많소? 그쪽이나 이쪽이나 다 같은 시민단체인데 통념에 의하면 똑같이 돈이 없을 것 아니겠소. 그러하니 그 통념으로 시민단체는 다 돈이 없다 그러니 살인적인 급여도 참고 운동에 매진해라 고 말하려고 한다면 당신의 시론은 우파, 좌파를 동시에 양비해야 논리적이지 않겠소? 이상하잔소, 돈이 없는 시민단체는 좌파인 것 처럼 통념을 깔고 가는 당신의 논리가 말이오. 맹세컨데 40억짜리 참여연대 빌딩에는 정부의 돈이 들어 있질 않소. 게다가 난 당신 같은 통념이 사라졌으면 싶소. 우파나 좌파 시민단체가 그 단체에서 상근하는 아이 있는 가장에게 그 잘난 학원은 보낼 수 있을 만큼 급여를 주면서 운동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오. 그러려면 회원이 많아야 하오.

참여연대가 이제 회원이 만명이오. 만명이 만원씩 회비를 내면 한달에 1억인데 형편 껏 내는 제도가 있어서 대략 7천에서 8천 정도가 한달 회비 수입이오. 모 참여연대 홈페이지 가면 다 나오는 자료니까 확인 바라오. 당신이 후원의 밤에서 대기업의 후원금을 안받은 이유가 그동안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고 한 것처럼 불필요한 통밥을 예단하고 했던 일이오. 순수? 근데 법률가가 순수 라는 단어도 쓰시오? 이게 당신의 가치관에 빗댄 순수요? 아니면 통념적 순수요? "꼭 순수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뜻인 듯하다." 이런 서술형태는 또 뭐요? 아니었다는 뜻인 듯 하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라면 모를까 법률가가 이런 긴가민가형 서술어를 감히 조선일보 시론에 써도 되는 것인지 당신의 법철학적 양심과 글쓰기 실력에 묻고 싶소.

환경운동연합에도 나쁜 놈은 있기 마련이오. 참여연대에도 내가 모르는 나쁜 놈이 있을 것이오. 조선일보나 뉴라이트에는 나쁜 놈 없소? 사회에는 나쁜 놈, 좋은 놈, 이상한 놈이 섞여 있기 마련인데 분포가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인 것이오. 돈을 삥쳐 먹었으면 그게 환경운동연합이던 조선일보던 변호사던 나쁜 놈, 나쁜 짓 되겠소. 이 나쁜 짓을 무슨 집시법 같은 것과 같은 맥락의 불법으로 이해해선 안되는데 벌써 당신은 그렇게 이해했으니 이것 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하오. 모든 법이 똑같은 원리로만 작동되는 것마냥 생각하는 비현실적인 법이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오. 도대체 왜 법률가들은 아직도 소크라테스 시대를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오. "자금 관리와 부정에 대한 처리가 동창회만도 못한 듯하다." 당신, 동창회 안해 봤소? 대한민국 동창회에서 총무라는 놈이 동창회 통장 들고 튀는 일 비일비재하오. 부정에 대한 처리요? 에이 친구끼리 왜이래, 걍 술이나 한잔 하고 풀어... 이게 동창회 아닌감요? 뭐 좀 산뜻한 논리 없소? 초장 부터 통밥에 계속 통밥인데다가 변호사 쯤 했으면 나쁜 놈, 좋은 놈, 이상한 놈 산전수전 다 겪어 봤을 법도 한데 허술하기 이를데가 없소.

"좌파가 주도하는 시민운동이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 맞은지 오래되었소. 아니 시민단체가 바라보는 사회는 언제나 위기이고 그 위기가 시민운동의 동력인데 오늘날 사회의 위기는 운동의 기폭제가 되지 못하오. 왜냐하면 시민사회가 그 위기를 통채로 감당하려 하는 패배주의에 휩싸였기 때문이라오.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투표하고 저항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소. 시민단체의 위기는 시민사회의 위기오. 이건 일전의 학생운동에서 사용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자본과 글로벌의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오. 근데 무슨 유레카인양, 2000년 총선의 낙선운동에서 그걸 찾으시오? 게다가 혁혁한 성과를 냈는데 정파성과 선거법 위반으로 국민이 견제 없는 권력을 견제 하기 시작해서 좌파적 시민운동이 위기를 맞았다굽쇼? 해괴하구려, 해괴해... 지금 국민은, 아니 시민은, 아니 민중은 자신들의 사회가 어떤 위기를 맞고 있는지도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오. 종부세를 내려 부자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서민은 이에 대한 저항을 거세하고 언젠가는 나도 종부세를 내고야 말겠다는 허망한 희망으로 노동에 박차를 가하거나 로또를 산다오. 이런 사회 제도에서는 개인의 노동만으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는데도 분간을 하지 못하오. 물론, 당신 같은 신자유주의적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가난한 자의 이런 허망한 희망이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굴리며 자본에 종사하고 당신들은 그런 자본으로 자본을 굴리면 되는 아주 이상적인 사회체제에 박수를 보내겠지만 말이오. 차라리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 이 셋중에 하나만 나왔어도 당신의 그 좌파가 주도하는 시민운동의 위기론에 논리적으로는 인정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오. 근데 이건 도무지 통밥을 넘어 해괴로 가고 있으니 참으로 이 나라 법률이 어떻게 되려고 하는 건지. 걱정만 생기오.

"그 시점에서 시민단체는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운동으로 전환했어야 했다....... 불법시위에 늘 앞장섰다. 야간의 도심을 '해방구'로 만들었던 광우병 촛불시위에도 어김없이 참가했다." 그 시점이란 2000년 총선 낙선 운동 때를 말하는 것이오? 시민을 위한 시민운동이란 무엇이오? 광우병 촛불시위에는 수십만명, 아니 연인원으로는 수백만명의 시민이 참여 했소. 이렇게 많은 시민이 거리에서 토론하고 광우병 쇠고기 먹지 않겠다고 저항했는데 이때 시민단체가 참여하지 않으면 무엇이 시민을 위한 시민운동이오? 당신이 혹여 해괴하게도 청계천 광장에서 비보이 공연을 주최하는 시민단체 같은 것을 설마 떠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당신의 지성을 보호해주고 싶소. 시민단체의 운동성, 최소한 참여연대로 국한해서 보겠소. 물론 당신은 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을 것이오. 참여정부때 참여연대인사들이 청와대나 국무총리실로 많이 가지 않았느냐 모 이런 얘기. 그렇소, 당신들은 140명 갔다고 하는데 당신들이 잃어버린 10년동안 70명 정도 정부기관으로 이동 했다고 하오. 그래도 참여연대는 비판을 끊지 않았소. 예를 들어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민주노동당이 집권을 했다고 칩시다. 이때 참여연대인사들이 너도 나도 정부쪽으로 움직이고 민주노동당이 하는 일에 죄다 동의하고 힘실어 주는 운동만 한다고 칩시다. 그럼 참여연대는 끝이오. 시민단체가 아니오. 이런 일은 정부기관이 하는 것이지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의 위기를 모니터링하여 제도 개선을 운동적으로 해 나아가야 하는 시민단체의 가치는 아닌 것이오. 권력의 코드에 맞는 일을 한다면 이런 가치를 잃어 버린 것이기 때문에 참여연대는 간판을 내려야 하오. 민주노동당이 집권을 해도 권력은 권력인 것이오. 비판이 있어야 하는 법이고 그것이 시민을 위한 시민운동이 되는 것이오. 왜 뉴라이트가 시민단체가 아닌지 좀 감이 잡히는지 모르겠소.

아마도 당신이 중점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정부에서 보조금 받고 그것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광우병대책회의 활동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고 싶은 것 아니오? 광우병대책회의에 참여한 시민단체 85곳에서 총 122억원의 정부 보조금이 그야 말로 보조되었다고 하오. 당신의 말에 의하면 그렇소.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참여한 시민단체는 대략 1,500개 정도 되오. 나는 이런 의문이 생기오. 왜 85곳만 받았을까? 1,500곳 전부 정보 보조금을 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당신의 최초의 통밥과 이것에 약간의 논리 적용이 가능할 것 같소. 건강하고 민주적인 정부라면 세금으로 시민운동을 보조해야 할 책임 같은 것을 느끼리라 생각하오. 시민단체는 통념적으로 돈 없이 이념만으로 사는 사람들의 오가니제이션이 아니기 때문이오. 불법시위에 앞장서는 시민단체에 돈을 대주는 선진국은 없다고 했는데, 선진국은 시위 자체를 불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같은 뜻으로 회합을 하려면 거리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다가 그 집회에 어울리지 않는 또 다른 시민들을 분리시켜 최대한 보호하고 일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불편을 덜기 위한 방법과 집회를 보장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물대포를 쏘진 않는단 말이오. 프랑스 같았으면 수십만명의 시민이 일주일만 거리에서 시위를 하면 연합노조가 자동으로 총파업을 하는 시스템이오. 그렇게 많은 시민이 모여 그만큼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고 정부는 그 소리를 성실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오. 이러한 운동에 정부는 보조금을 지급해서 활성화 시키는 것이 선진국의 민주적인 정부의 사례이며 권력에 대한 시민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동의 하는 것이 선진적 이성이란 것이오.

"정부지원사업비의 30~40%를 단체의 운영비로 전용한다는 사실은 '업계'의 상식이다." 당신의 논리가 왜 이렇게 해괴한지 보여주는 단어가 드디어 말미에 등장하오. '업계', 시민단체를 업계로 보는 당신의 조악한 인식의 한계 말이오. 그리고 무슨 사업을 하려면 그 사업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법률가라 사업은 잘 모르시나? 어쩌려나... 암튼 사업에는 인건비가 가장 많이 들고 인건비는 곧 운영비오. 30~40% 가 아니라 100% 를 써도 모자른 것이 인건비인데 시민단체 상근자들한테는 급여를 동결하고 그나마 나머지로 더 좋은 스피커, 더 좋은 프랭카드라도 써서 사업하는데 뽀대내서 관심이라도 끌려고 60~70% 를 쓰니까 사업이 되는 것이오.

"시민운동은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려는 시민들의 자발적 노력이다. 따라서 시민단체는 자체 회비로 운영되는 게 원칙이다." 아주 좋은 얘기오. 참여연대 자체 회비로만 운영되고 있소. 당신들의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도 반드시 그리해주길 바라오.

"범법자의 생활비를 세금으로 대 주는 일이 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법률가라면 집시법 한가지만 운운하지 말고 헌법 같은 것도 읽어 주고, 시대 상황, 그리고 왜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지 전후 사정을 다 고려하고 법을 들이 대길 바라오. 게다가 범법자의 생활비 라는데, 살인자도 국가가 제공하는 감옥에서 먹고 자고 입고 싸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소. 살인자도 그 죄에 벌을 받는 동안은 우리가 그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는 말이오. 이런게 사회요. 서로 의지하고 책임지며 홀로 외롭지 않도록 하는 사회 말이오. 내 생각엔 당신은 범법자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것이 너무 아까운 것 같은데 이참에 세금을 내지 않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오. 게다가 그렇게 순수한 분이 변호사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소. 무죄를 추정해야 겠지만 꼭 무죄인 사람만을 골라 변호하지는 않을 것이지 않소? 그럼 그 범법자가 주는 수임료는 어떻게 순수한 마음으로 받으시는지... 그야말로 범법자가 주는 수임료로 생활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오?

아무쪼록 이 가을, 지성을 흠집내는 이성과 가치관을 키우는 독서를 권장하는 바이오.

P.S
행여 또 오해 할까봐서, 참여연대나 진보신당의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이거나 그런 입장은 아니니 호들갑 떨지는 마시오.

조선일보 시론 [시민단체와 돈]

2008/09/24 01:51 2008/09/24 01:51
DrunkenSTAR 이 작성.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미 육군대장
마크 W.클라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
김 일 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 덕 희

포로교환문제로 교착상태 있던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아이젠하워 취임, 스탈린의 사망으로 포로교환문제에 돌파구를 열고 1953년 7월27일에 판문점에서 마크 W.클라크, 김일성, 팽덕희가 서명한 한국 전쟁의 정전에 관한 협정을 조인합니다. 당시 남한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불사하며 정전협정 조인을 거부합니다. 이승만의 이런 몽니와 북진통일론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통해 미국으로 부터 한미상호조약을 이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만, 이승만의 서명거부로 인해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끈 '3자, 또는 4자간 종전선언 추진' 에서 그 당사자에 대한 논란은 사실 중국이 아니라 남한의 소외 내지는 남한을 염두에 둔 것 입니다.

창비논평을 통해 이남주 교수가 주장한 '3자 혹은 4자의 종전선언 추진, 중국이 섭섭할 일만은 아니다' 는 마치 남한은 당연히 종전선언 대상자로 규정하고 중국에 대한 외교적 건설적 사고 전환을 요구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 인용한 중국 관계자의 발언, 즉 "유감 이상의 것"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식의 발언은 중국정부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보도를 근거로 중국정부의 태도를 판단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중국의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인정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냉정하게 판단하면 중국이 섭섭해할 일만은 아니다.]

국가간 계약에 준하는 협정은 개인간 또는 법인간 계약의 조항과 단어보다 높은 단계의 법적 근거를 가집니다. 흔히 신의와 성실로 계약을 이행한다는 정성적 조항이 들어가는 개인, 또는 법인간 계약서에도 계약서를 날인하지 않은 당사자가 감내라 밤내라 훈수 둘 수 없는 것은 상식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거와 대상의 상위 개념이 존재하는 국가간 협정에 당사자로서 법적 지위가 없는 3자가 협정의 선언적 효력상실을 논하는 것은 유아적이지 않는가라는 점 입니다. 감성적으로는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북한의 신의와 남과 북이 한 테이블에서 서명한 남북공동성명의 당사자라는 것 만으로 북한이 남한을 종전선언 당사자로 인정했고, 국제사회도 이의가 없을 것이란 발상은 그야말로 추측과 낭만적 접근에 불과한 것 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남주 교수의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적 중국 역할은 그 자체가 감정적입니다. 논평에 의하면 논의와 선언을 따로 분리하여 궁극적으로 포럼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단계임을 주장하시는데 논의와 선언의 당사자가 바뀐 국제회의나 사적회의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할 포럼의 목적이 종전선언이라면 4자 였을 경우 남한이 현실적 당사자가 될 수 있겠지만, 3자 였을 경우 남한이 낄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물론, 사실상의 정전위원회가 북한의 도발로 그 기능을 상실했고 1994년 중국도 정전위원회에서 무단 철수한 것을 들어 3자일 때 중국을 종전선언 당사자에서 제외하는 것도 무의미 합니다.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선언을 통해 텍스트를 쓰고 지우는 행위는 염연히 다른 것이지요. 이 문제는 너무나도 명백한 텍스트적 역사여서 이견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한미FTA 나 NLL 에 관한 논란도 마찬가지 입니다. 먼저 텍스트로 쓰여져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나서 유권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유권적 해석도 직접 당사자간 합의나 사회적으로 공인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민주주의적 협의체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한미FTA 에 개성공단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개성공단 생산품은 메이드 인 코리아로 수출될 수 없는 것 입니다. 이것을 두고 포함되어 있네 없네 라며 논란을 할 깜이 안된다는 겁니다. NLL 은 육지의 군사분계선에 준하는 영토선이라는 단어로 규정한 협의문이 없다면 모두가 자의적 해석일 뿐 입니다. 이것은 잘못 정해진 총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어떤 각론도 논리적이지 않아 난독증을 유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전동화가 아닌 다음에야 텍스트로 쓰여졌고 그것을 증명한 당사자의 서명까지 존재하는 역사를 그럴리가 없거나, 그럴수는 없다는 감성적인 태도로 접근하게 되면 우격다짐만 늘어나기 마련 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남주 교수가 주장한 것 처럼 정전협정이나 정전위원회보다 더 높은 정치적 합의체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를 일 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호한 주장을 통해 당연히 남한이 종전선언의 당사자라고 믿게 되는 민중이 많아 진다는 것 입니다. 꽃다운 젊은이들로 구성된 남한의 군대가 남한의 사령관이나 국군 최고 통수권자의 이름으로 평시에 작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도 불과 몇년 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전시에 남한의 젊은이들은 미국에 의해 움직여 집니다. 남한의 젊은이니까 당연히 우리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것이 바로 낭만적인 현실시각 입니다. 지식인이라면 명백한 역사를 논해야지 정치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들을 유념해서 역사를 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남주 교수의 3자 혹은 4자의 종전선언 추진, 중국이 섭섭할 일만은 아니다 는 주장은 유감스럽습니다. 우리는 정전협정의 대상자가 아니고 아직 까진 종전선언을 할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습니다.

2007/10/13 22:33 2007/10/13 22:33
DrunkenSTAR 이 작성.

역사관이란..

2007/02/02 01:42 / 생각
이러한 정의는 국사 점수에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책을 많이 읽어서 얻은 지식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역사 자체를 구태의연하고 고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학문으로 폄하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역사를 조망하고 현실을 진보시키는 그야말로 역사관의 역할은 알싸한 부동산 투자 정보 보다 저급한 취급을 받아도 이의가 없을 지경이다. 하다못해 역사관 운운 따위는 엘리트 의식에서 나온 이기주의의 소산으로 즐거운 술자리를 망치는 식상한 이야기이거나 지배 계급의 논리를 추대하는 정치적 메카니즘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였다.
지배 계급은 역사를 통해 기득권을 쟁취하고 영위한다. 즉, 정치의 흐름에 영합하고 들쭉날쭉한 여론 몰이배로서 역사를 들먹이며 민중의 시야를 흐려 놓는다. 그들의 역사관 속에는 현재의 정치 안목과 국가의 안위 따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역사를 정략적으로 사용하거나 주입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국론이나 국익에 목마른 대중들의 애국감정에 호소하여 역사의 본질을 꽤뚫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 목적이 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근간이 사상이나 교양의 고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역사속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거취가 만들어 낸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부도덕하게 관리하고 세습한 결과로 불리우는 기득권을 수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관은 이러한 기득권을 착취 해야 한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의 본질을 진보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조망한 진보로 규정한다. 대중들이 현안의 본질에 한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고 변두리를 집적거리는 이유도 과거를 충분히 조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없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역사에 빗대어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관을 통해 기득권이 착취되지 전에 지배 계급의 정략에 현혹되어 그들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인양 합리적이지 못한 계급 동질화에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거권을 획득한 민주화의 노력을 마치 지배 계급의 아량으로 생각하고 이것으로 모든 민주화가 이루어 졌고 그들은 역사적 책임을 다한 것 처럼 과거를 이해해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남한 대중의 정치 수준은 남한의 민주화가 선거권이라는 공화주의의 형식을 갖춤으로서 완성되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지점에 머물고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갖추기 위한 인권과 인간성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
천박한 역사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들은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고' 라는 취미의 기준으로 현상을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부재하다. 대중들의 무지는 그 열띤 파쇼와 포퓰리즘이 속성도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끄는 지식인들의 반지성적 행위가 어떻게 책임을 전가하고 권력으로부터 무한한 보호를 받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일반 민중들의 양심과 의식에 지독하게 악랄하여 단기적으로 무마할 수 있으면 장기적으로 면책 되는 어두운 역사의 고리를 끊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옮바른 역사관은 청산하는 역사관이다. 전쟁을 벌인 자,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한 자,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옹호한 자들을 청산하는 것이 옮바른 역사관이다. 따라서 역사관은 기득권을 착취하고 반지성적인 지식인을 지배할 때 바로 선다.
2007/02/02 01:42 2007/02/02 01:42
DrunkenSTAR 이 작성.

진보와 좌파

2006/09/01 02:38 / 생각
진보와 좌파는 무엇이 다를까? 이 둘을 같이 생각했었던 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보는 역사의 인식속에, 좌파는 이념의 스팩트럼속으로 한정지을 수 있다.(한정 지을수 있어야 한다.) 논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 시류를 배제할 수는 없다. 시류에 편승이네라는 논점은 애초에 관점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시류에 대한 것이야 말로 시민과 민중의 이해도이기 때문이고 그 숫자에 대해서 겸허해야 될 태도가 존재한다. 본류에 대한 문제는 사실 먹물의 의무이다. 그만큼 본류를 시류속에 편승시켜야 하는 실천, 그에 반하여 시류를 본말전도식으로 포퓰리즘으로 즉각적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다만, 오늘날 현안적인 문제에서 매체의 발달에 더불어 여론의 호도적인 측면은 여전히 지식인들이 극히 지식인적인 행동에 가난하게 대처해서 생긴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진보적 지식인과 좌파적 지식인이 다른점을 담론하기도 전에, 자칭 진보정권이라는 집권세력의 분열적 좌파신자유주의의 노선에 있어서 정녕 진보와 좌파의 의식이 폄하되고 있는 심각한 현안에 대해서 침묵을 강요하는 기득권, 보수수구세력들의 민족주의적 반동에 대해서 우왕좌왕하는 진보와 좌파들의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글..

2006/09/01 02:38 2006/09/01 02:38
DrunkenSTAR 이 작성.

사학법과 지식인

2006/06/30 16:45 / 생각

지식인의 지식이 세상의 객관적 인식론과 지식인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의 총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관 개념으로 한정되어 있을 때, 지식인에게 이념이나 제도가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지식을 보관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지식인이 사회의 문제에 한정적으로 접근할 때, 그리고 최근 수정주의? 계량주의로 인식되는 근본지향적 지식의 역할이 진보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타협점으로 수입된다면 역시 보관하는 개념에서 한발자국도 진보하지 않은 것과 같다. 요즘의 지식인들이 항쟁의 역사를 되풀이 하자는 선동을 하지는 않지만, 현장성 있는 생생한 참여는 불구하더라도 저항의 제스쳐마저 립싱크로 대신하는 심심치 않은 현상은 역시 진보는 그 좌적인 생리상 섬세하고 섬세한 논리 정연으로 자멸하고 마는 역사만은 온전할 수 있겠다 싶다. 이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자멸, 공멸에 가까운 정책 입안은 그 비판거리에서 한참을 빗겨나간 사안이라 볼 수 있다. 어찌됐던 수많은 지식인과 수백, 수천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의 정책에 대해서 공청하고 토론하고, 깃발과 함께 저항을 일삼고 있음에도 사회의 현안에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른바 풀뿌리 지식인의 산실인 대학은 정치적 언론 플레이와 부당함을 상식으로 여기는 비겁함을 소실점으로 삼는 분위기다.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이 정계 개편의 서막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들만의 정치공학은 혹독한 선거 결과를 견디는 그들만의 무기가 되었을 법도 하다. 한나라당의 치졸한 법안 연계 처리의 작태는 입에 담다가도 토해 낼 역겨움이지만, 토양을 보고 씨를 뿌렸어야 했을 노무현 대통령과 그 일당들이 정권을 통해 추구한 변질의 시대는 다른 토양을 다른 판을 짜기도 힘들게 만들었다. 이 지점에서 다른 토양, 다른 판이 될 수 있는 지식인의 산실에 매우 주목할만한 정치적 사안은 사학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이 교육 전반의 개혁을 가져올리 만무한데다가, 사학이 이를 통해 투명한 인사, 회계는 물론이고 교육이 인간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로써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또한 의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성을 내포한다. 의문이 있다는 것은 현재의 부정으로 말미암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정치권에서 얘기하는 정계 개편의 서막은 노무현 대통령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이도 그는 이미 그 포지션의 유지를 위한 동상에 불과하다, 즉 그는 불신임 되었다. 정계든 지식인의 토양이든 개편의 꼭두서니에 사학법이 서 있다고 보는 것은 정권이 말한 개혁과 우파 야당이 말한 보수가 그 지점에서 가장 첨예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있는 그들이 얘기하는 정치공학적 개편은 그 맨끝에 서 있는 사학법에 손을 대느냐 마느냐에 있는 것이다.

사학법 개정안의 통과로 동국대 강정구 교수나 강남대 이찬수 교수 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지성의 후퇴가 갑자기 전진의 깃발을 찬란히 휘날리리 없겠지만, 최소한 그 교수들이 당한 봉변을 판단하는데 누가 비겁하고 누가 반지성적이며 누가 반사회적인지 가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해본다. 물론, 법을 지키며 개혁의 요구에 노력하는 사학에 대해 그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겠다는 교과서를 더듬거릴 시간 조차 없다. 우파의 속절 없는 뭇매에 장사가 되지 못한 사춘기인 좌파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결국 다음 대선까지로 한정된다. 여전히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에 대한 현실감각이 이를테면 더 천천히 바꿔가기 식의 섬세한 논리정연보다 상쾌한 이유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현안적인 한미 FTA 에 찬성하고 반공주의 같은 편협한 사고의 매몰이 주체적 지성에 반동적이라는 지식도 아닌 역사의식을 숱한 지식인들이 결국 모른체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비겁할 뿐이다. 비겁은 권력을 숭배하며 기생하는 것. 정권을 회피할 줄 모르는 비겁이라는 지식인의 반지성은 그 권력이 추구하는 이념이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역시 관계가 없다. 남은 시간은 2년이다. 권력이 과연 제대로된 좌파 사회주의로 바뀌게 된다면 그 반지성적 지식인들의 청산이나 뼈를 통해 요구 받을 혁신은 권력의 입장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어차피 그들은 구체적인 사안에 구체적인 대응과 구체적인 진실을 알릴 지식인도 아닌데다가, 진정한 사회적 책임은 모른체 하고 그들이 숭배하는 이사장의 자본이나 예수의 불관용과 편파에 종사하는 대중의 맨끝에 선 자들일 뿐이다.

그 반대편 맨끝에 사학법이 있다. 실은 국가보안법도 동무를 하고 서 있어야 되는데, 그 맨끝에 선 자의 가슴 시림을 지켜야 하는 것, 그것이 좌파의 할 일이다. 반은 좌파라고 주장하는 좌파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당면과제로 인식될지, 정계 개편을 하려는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2006/06/30 16:45 2006/06/30 16:45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