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노망 났다 는 김근태의 반응은 단 한 순간도 정치적 판단을 버릴 수 없는 직업 정치인의 진정어린 오만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과 적당히 선을 둔 전력이 있었지만 그도 민중의 생존적, 정서적 환경을 파탄 내버린 정권의 중심이 아닐 수 없기에 명백한 오만이다. 오늘날 대선구도가 병리적으로 이상징후로 치달아 결국 노망이 될 수 밖에 없는 말기적 증상이 된 원인이 오로지 정권 교체의 열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 한마디로 정치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기득권 수성에 나섰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후안무치 하지만 국민이 노망나지 않은 명제를 증명할 마땅한 함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BBK 의 안개가 걷히고 이명박 대세 구도가 고착되면 그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광명이 고작해야 한반도대운하와 300여개 사립고 라는 점이다. 국토를 찢어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를 통해 물류를 진작시킨 근대 국가가 없었고, 사립학교를 늘려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비를 줄이는 풍부한 상상력을 적용한 사례가 없는데도 그의 지지도는 절대 물러섬이 없다. 국민을 통채로 치매환자로 규정한 고약함에서 정신을 차리고 망조의 관점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김근태의 노망은 정동영이 안찍고 어떻게 저런 위선적 인간을 지지할 수가 있냐는 통탄이다. 하지만 한스러움 수준에 머문다. 모두에 말했듯 그도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한 정권의 반민중적 인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대운하와 교육정책의 방죽을 넘는 정권 교체의 열망이란 것이 노망적 지지도로 환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어두운 전망은 이러한 고착구도가 그대로 선거에 반영될 가능성 또한 사실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이러한 정권 교체의 열망을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역부족에서 찾고 있고 벌써 부터 이를 반성해야 한다며 이론의 숙지 자세로 접어 드는 채비를 서두른다. 분열적 좌파가 아니라 텍스트적 좌파의 위험도가 증대되어 그나마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운동적 투쟁마저 거둬들이는 어둠은 아닐런지 염려스럽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민중 계몽은 분명히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김근태식 반응으로 국민이 노망난 이유는 오래도록 한국 사회를 주름 잡고 있는 시행착오의 경험과 손쉬운 용서에서 비롯된 무식한 교양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김근태가 말하지만 않았다면 이 사회와 국민은 확실히 병리적 이상징후에 빠진 집단 정신병동 맞다. 정신병동은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인간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 실존의 문제에 맞닥들인다. 오늘날 대선구도는 이러한 실존적 문제에 직면해 있고 모두가 생각을 놓고 좋은게 좋은 손쉬운 용서를 저변에 깔아 놓음으로서 실존적 문제를 쓸어 버린다. 다시는 현실로 복귀하고 싶지 않은 분열적 상태의 지속을 바다 이야기에 찾는 대중들로 가득차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이러한 반동적 심리는 이명박의 능력이나 인물의 매혹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대게가 정권교체의 열망이라는 노망 현상에 기인하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나 이회창 보다 덜 보수적이고 실용에 가까운 이명박이 호주머니 사정을 좀 낫게 해주겠다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박근혜의 권위적 보수로의 회귀보다는 낫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그가 살며 보여준 온갖 치졸한 태도와 저열한 교양은 스스로 제작한 사제 시한 폭탄이다. 실용적 보수가 옮고 그르다는 판단은 유보적이어도 도덕적 파탄에 대한 노망적 용서의 집단 행위는 분명 시한 폭탄의 파편에 당할 방패막이를 자체하는 꼴이다.
오늘날 대선 구도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의 빈곤이 주물러진 한덩이의 빗살무늬 토기를 구워내는 상황이다. 게다가 견디기 녹녹치 않은 정서적 폭력의 상황인 것이다. 아 정말 기가막힌 것은, 왜 우리 사회는 다른 사회가 겪은 시행착오의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반복 경험해보고서야 배우게 되는 것일까?
검색어 '좌파'에 대한 5 개의 검색 결과

캔버스에 유채
139.5 x 105.5cm
어떤 머리틀을 써야 할까?

캔버스에 유채
41 x 33cm
더비 해트도 아니고 파이프도 아니다.

캔버스에 유채
130 x 97cm
죽은 물고기는 생선이다.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도달할 수 없는 이유가 진실이나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구에 있을지도 모른다. 추구하는 행위에 진실이 묶여 있고 진실은 더 이상 주목 받지 못하고 죽어간다. 죽은 것을 살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은 재현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죽은 것을 통해 현실을 보게 되면 그때 보이는 것이 진실일까?
보이는 것만 믿어도 상식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일차원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실현되기가 실로 어렵다. 노빠의 좌파신자유주의의 낯설게 하기가 그랬고, 황빠의 말씀만으로 존재한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가 그랬다. 보이는 것 자체가 저열한 분열을 일삼았고 광기만을 지닌 텍스트들이 난무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세계는 정치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 자체가 초현실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엄청나게 늘어난 정보량, 감당하기 힘든 패러독스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의심치 말아야 할 세계가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우상안에 갇히기를 원한다. 편안한 세상, 안락한 금가르기의 현실에 필요한 건 죽은 것을 살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캔버스에 유채
65 x 80cm
그럼, 여긴 바다속??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는 1937년 프랑코파를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한 일에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는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공화국 정부관 주최의 전시회에서 폭탄에 놀라 부릅뜬 눈동자와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벽화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피카소는 죽음에 대항하는 삶의 편에,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의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이나 큐비즘이 부르주아지적 현실을 거부하는 정신에서 비롯 됐다는 점에서 대게의 큐비즘 작가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예술적 영감에 의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독재에 저항하는 논리적 귀결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파괴를 창조의 미덕으로 삼고 평화를 권력의 반동으로 연관지었던 시대에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양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결집을 만들어 냈으며 정치적 준거로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피카소의 열정이 지나쳐 주위의 사람들을 망치거나 분열시키고 가족들 마저 그를 경멸하는 것을 읽으면서,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을 점령한 열정적 젊음과 좌파 지향을 한없이 부러워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
이어지는 글..
이러한 반성이 끊임 없이 행위되어야 하는 당위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보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자격 논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의 중대한 범위는 실은 생각의 권리와 범위이지 오로지 사적재산의 범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멈춰있지 않고 바쁘고 자유로울 때, 물질은 가야 할 곳, 공평한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나의 생각이 일단 그러하지 않고는 유물론적 가치관은 공평하지 않고 극히 사심에 의한 복무에 열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도 현실과 괴리를 가지고 생각하는 방식은 이상주의의 조달이거나, 근본주의의 회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마저도 먹물의 기득권이라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을 기득권이라 규정하고 나면 할 일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사상과 글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새로 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이 터지는 것은 믿음을 가진 몇몇 선각자의 일이 아니라 같은 생각을 가진 민중들의 소통과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일개의 민중으로 부터 내가 해야 할 일과 도울 수 있는 일들을 찾고, 보잘 것 없고 어줍잖은 노동을 보태려 할 뿐이다. 내가 제도권에서 어떤 위치의 인간이냐는 입바른 명예욕과 경계지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주의가 오직 진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가장 역사적인 철학은 이기심이다. 이로서 '여유있을 때, 세계을 둘러보겠다' 는 경제적 접근 방식이 현대를 지배하는 술어가 되었다. 세상을 둘러보는 물리적 여행과 세계를 둘러보는 사색과 의식의 범위를 쉽게 동질시 하는 안락한 금가르기는 만행에 가깝다. 인간이 오로지 이기적임을 규정하고 부터 시작하는 경제학의 토폴로지가 그 자체로도 불가능하며 우리는 편리함에서 수고스러움으로 가벼운 전환을 해야 함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의 가장 원형적인 이상주의인 것은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그 만족이란 것에 접근할 수 없고, 단 한번의 붓그리기로 세상의 문법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 본능적인 이기심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나의 담론은 선동적일 수 없다. 불평등한 기억에서 평등한 선동으로 맘 편하게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령처럼 떠도는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붙들고 거대 담론을 타파하기 위한 선동으로 술자리를 이끌어야 하는 충분한 성량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감수성과 이성에 걸쳐 자본이 해결해준 것이 무엇인지, 자본의 순환고리에 매수되어 짐짓 외면 했던 이웃들의 제스쳐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모여 하나의 활동이 되고 현상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나마 좌파라며 떠들 수 있는 술자리를 조금씩 줄이면 소비가 기여가 되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첫걸음을 기반삼아 행여 큰 활동이 되려 노력하거나 강시처럼 이마에 경제적 면죄부를 붙이고 다니지 않고, 세상을 찬찬히 면밀하게 둘러보고 보잘 것 없는 손을 내미는데 그 노력을 거둬들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돈이 판치는 사회에서 여기 저기 쑤시며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자본교환적 가치가 어떻고 노동이 어떻고 공평이 어떻다니, 또 다른 세계의 지배를 꿈꾸는 떠돌이 이상주의자냐 넌?
그리하여 난 스스로 헐거움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 실은 토론도 최소로 해야 한다는 점에 동참하면서 동시에 이해를 위한 언어의 첫번째 기술은 열거라는 점을 원칙하고 있으니 여전히 패러독스다.
1. 평등하지 못한 담론의 장
내 말이 아무리 개소리라도 대화중에는 절대 비웃을 수 없는 자리, 개소리인줄 알면서도 그 개소리를 억지로 주입시킬 수 있는 자리, 개소리에 대한 반박을 하더라도 논리 정연하지 못하면 논지나 반박으로 받아 들여 지지 않는 노련한 처세와 화술의 장, 불평등할 수록 강한 개소리가 지배되는 대화의 장에 익숙한 사람이 평등한 담론의 장에 참여 하기 위해 갑자기 겸손과 조심스러움의 태도로 임할 수 있을까? 그로인해 평등한 담론 이전에 의식이고 의식 이전에 교양이다. 담론의 장에 계급적 평등이 아닌 교양적 평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그 장이 토론이 되거나 반목이 되거나 한다.
2. 칼라로 구분되는 노동
블루만이 기계 자본에 억압 받는 노동자가 아니다. 실은 사무직과 현장직을 가른 화이트와 블루의 계급성 자체가 수정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져온 것이다. 노동의 신성함이 블루에만 있다는 주장은 이상주의이면서, 그 구분를 두고 은연중에 사무직이라면, 사무직이라 생각하는 화이트라면, 노동이 아니라는 관계 정립을 통해 근로 기준법의 테두리에서 소외시키고자는 음모이거나 무의식속에 침작하려는 의도이다. 화이트? 당신도 노동자다.
3.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자격
노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노동 임금이다. 노동임금이 노동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고 잉여자본으로 남아 축적된 자본의 기능이 역시 노동자의 풍요로움으로 연결되지 않고 지배계급이 수혜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만 늘리는 수단으로 쓰여졌기에 자본의, 자본으로써의 이념이 왜곡되었다. 그로인해 자본은 곧 부르주아지, 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척도, 지배계급의 기득권 등이 되어 노동자는 돈이 없는 사람으로 탈바꿈 되었다. 다시 말해, 없는 자만이 노동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되는 희안한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4. 노동자이면서 자본가
자본은 노동자의 희생과 피를 먹고 확대된다. 노동자라고 해서 저축하지 말라는 법 없고, 이념 없다. 완전히 화폐가 없는 원시로 회귀하던가 세상을 뒤집지 않고는 노동자가 노동 임금으로 적립식 펀드 넣지 말라는 이념만으로 접근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주의다. 우리가 얘기하는 양극화는 어떤 양극화 인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양극화인가? 목로의 주점에서 떠드는 양극화는 대게가 노동과 자본의 양극화이다. 하지만 그 양극화가 이념적으로 완전히 구분지어 질 수 있는 양극화인가? 양극의 2할을 제외한 나머지 6할은 자신의 사상을 규정하지 못하는 미성숙자들과 노동자이면서 자본가들이 모인 집단인 셈이된다.
5. 노동을 보호할 의지
그럴줄 몰랐던 현재의 정치적 지배계급이 급속도로 그들의 이념을 수정했을 때, 정반대로도 갈 수 없는 좌파 지지층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이며 어디인가? 비정규직 법안을 통해 곧 노동자가 될 계급들이나 화이트 노동자들의 무관심이 들어나면서 그들은 오로지 돈벌 기회만 궁리하게 되고, 그 궁리만을 하도록 모종의 강요가 있다는 점도 함께 간과해 버리면서 새만금과 대추리가 자연스러운 내용이 되버렸다. 이런 재료를 통해 이제 정부는 더 이상 노동, 인권을 보호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노동자는 더 먹고 살기 어렵게 되고 파괴된 환경의 더미에서 인권에 가차가 있을 턱이 없다.
6. 담백한 선택
더 이상 노동자의 지위를 온전히 보전해주지 못하는 지배계급,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고 미래를 영위해야 할 인권을 확대시키지 못하는 정부에 저항하는 담백하고 솔직한 선택은 계급혁명 뿐이다.
또는 지지층이었던, 그 층에서부터 들고 일어 나야 하는 탄핵 뿐이다.
7. 현안을 바라보는 방법
일단 현안을 보는 교양의 문제다. 미국과의 관계가 사인하라면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 사인할때가 되면 사인하고 마는 태도로 보는 현안이 자유를 말하는 교양인가? 자본의 이해로 FTA 며 자본시장 통합에는 반응도 없던 이들이 거대 자본이 은행 하나 먹튀했다고, 또는 블로그 서비스 하나 인수합병 했다고 급작스럽게 성질을 내는 것은 과잉 민족주의와 다를바 없다. 통계적으로 현안을 파악하는 방법에 익숙할 수록 대중속에 숨는 방법도 가지가지로 빨라지는 법이다. 건강한 시선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가장 먼저 건강한 시선으로 통찰하는 방법은, 통계적으로 현안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좌파라면, 그리고 노동자라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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