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지성 의문

2006/10/31 00:50 / 생각

지적이라는 단어는 어떤 상투적인 분위기만으로 뭉둥그릴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섹시하다는 쾌감의 영역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대게의 경우 지적이란 분위기가 일치할 경우는 지적인 언어를 구사할 때이다. 지적인 언어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수사들의 집합이 아니라, 정확한 단어의 구사만으로도 지적 혼돈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다. 정확한 단어의 구사는 팩트를 생산하기 위해 구상되는 논리에 의해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쾌감과 취미를 표현하는 구도 안에서도 어떤 단어를 구사하여 표현하는가에 따라 이 지적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오래도록 지식과 지성이 이루기 어려운 개인의 능력치로 간주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범위 안으로 종속되어 졌다. 따라서 지식이 있다고 판단되어 지는 사회적 척도로서, 학력이나 그러한 학력을 가진 사람과의 혈연, 지연의 관계가 사회적 합의를 결정하는 계급으로 인정 되어졌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보수적으로 말이다. 사실 이러한 전통속의 지적 인격체로 인해 그 지적이라는 판단은 모두 허구 였음이 드러 났음을 개탄하곤 하지만, 지식이라는 사회적 합의(이 부분도 그들만의 판단일 가능성이 높지만)의 허구라기 보다는 지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역사의 연속이라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식은 언제나 대게의 인민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끊을 수 없는 고리와도 같았다. 이러한 굴레에 백성처럼 살 수 없는 것이 또한 민중적인 발현이다.

전통적인 지식의 무리가 반복해온 역사를 끊어 먹는 현대적 방식으로써 집단 지성이 화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그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를테면 지식이 통제하던 미디어의 메카니즘이 민중들의 통제로 헤게모니 이동을 감행하고 있는 현대적 현상이 바로 집단 지성이다. 공교롭게도 가장 진보적인 매체인 인터넷이 이러한 화두의 온상이 된 이유가 오직 네트워크의 필요라는 루소(언어의 기원)식의 계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책임으로 만들어진 공공의 지적 체계에 대한 존재 이유를 깨달은 의식이 현대적인 개인화나 익명성만으로 설명되어 질 수도 없다. 공공의 지적 체계는 자발적인 판단이 공동으로 집합되었을 때,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정치적인 의식의 발전과 이를 그대로 메카니즘에 적용한 탄력적인 미디어의 역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판단되어져 온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 더 안전한 방식인 집단을 이용한 지적 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이며, 지적 판단을 역사의 연속성상에 있는 인민 지배 계급에게서 분리시키려는 천천한 개혁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털어 Web 2.0 이라고 하고 네트워크의 법칙상 그 우주적 확장을 집단적인 어떤 형태로 묶으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 작업에 대한 현실적 적용의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집단에 지성이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아니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근본에 대한 회귀가 보수적인 접근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보더라도, 집단이 만드는 대중적, 공공적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하는 데 있어서 구현되는 메카니즘은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을 뿐이다. 지성이라 함은 더더욱 흥미롭다. 앎의 정의가 아닌 헤아림의 정의로 수많은 '그것' 을 '다름' 으로 통찰하게 만드는 것이 지성 아닐까? 이것은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두 가지 힘인 '동의'와 '반대'가 반복적으로 작용되어야 한다. 다수결은 이 판을 깨는 반민주적인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너무 오랬동안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졌다. 많은 사람들의 집단 지성은 메카니즘안에서도 반민주적이라는 결론이다.

기술적으로 이러한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한 자본은 인색하기 마련이다. 자본이 언젠가 민주주의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기에는 인간의 역사가 너무 숨가쁘기만 하다. 게다가 이념적 무장이 없는 민중들을 선동하는 정치 구호속에서 그 집단 지성이라는 혁신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집단적으로 동원되고 세를 과시하는 일련의 활동이 난무하는 광장에서 지성이라는 헤아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광장의 활동은 그대로 인터넷의 진보적 화두속으로 옮겨져서 상업주의와 쉽게 결탁해버린다. 이제 이 집단적 지성이라는 네트워크가 오묘한 인간의 이합을 통한 경험의 공개인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의도적 조작인지 알 길이 없어졌다. 자본이 파괴하는 것이 더 이상 자연으로 한정되지 않은지 오래지만 의문은 허탈한 답을 내고 만다.

집단 지성, 참여, 공유 같은 한무더기의 정치적 속성을 뿜어 내는 Web 2.0 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한껏 부풀어 전진하는 신작로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아니 대중의 집단 이성이 이 개념적인 기술 진보에 하루속히 동참하기를 뽐내며 기다리는 해괴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인간적 가치를 투철하게 관념한다는 어느 나라에서 조차도 반민주적인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 의식이 부족한 민족에게 지나치게 빠른 기술의 구현은 재앙일 수도 있다. 더 잘 사는 것만이 관심사인 민족이나 대중에게 상업주의는 숭고하다. 자본은 이 냄새를 간파한다. 더 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개인을 속이는 일은 비일비재해서 가십거리도 되지 않는다. 더 잘 살려는 숭고(?)함도 없으면서 집단이 나서니까 어떤 헤아림도 없이 나서는 자들까지 합세해서 개인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 작은 가십이 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 집단에 종사하도록 만들어지는 지나친 기술의 도입은 반드시 개인에게 명백한 재앙이 된다.

2006/10/31 00:50 2006/10/31 00:50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Web 2.0 의 체제의심

2006/02/15 22:03 /
요즘 IT 에서 Web 2.0 이 뜨거운 감자다. 벌써, 개념화 단계에서 실천적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전에 이 개념을 들었을 때, '트랜드에 목맨 사대주의 노드(Node) 들의 선동' 쯤으로 일갈해버렸다가, 두 달 전에 시즌 첫 철야보딩을 가던 중 졸음을 쫓기 위해 주고 받았던 얘기에서 다시 내 생각의 범주로 쏜살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은 하였으나 보딩메이트는 web 2.0 의 신봉자였다. 대번에 김중태의 시만택 웹 을 추천했고 지난 주 용산 회집에서 건내 받았지만,(고맙습니다) 이미 그 두달의 시간동안 web 2.0 에 대해 꽤 공부가 되어 있었다. 공부는 바로 의식화 되어야 하는 강박관념에 빠진 나와 신봉자는 만날 때마다 web 2.0 아니면 참여연대식 토론(제주도에서 참여연대 간사님들과 보낸 이틀밤동안 터득한 방식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을 즐기게 되었다. 열뗬다기 보다, 즐겼다는 게 맞다. 그랬기에 파무침 같은 몸을 이끌고 남대문 순대국집이나 용산 회집을 기웃거릴 수 있었을 테니까.


방금 전에도 신봉자는 내일 월차를 내고 web 2.0 conference 에 같이 가지 않겠냐며 연락이 왔다. 언감생심, 지방에서 클라이언트의 위세와 나의 자존심을 줄타기 하고 있는 新왕의 남자에게 있어서 몸의 위치는 세치줄을 벗어 날 수 없었다.(미안합니다) 신봉자보다 먼저 간 제자들은 개념과 토론의 단계에서 실체성으로 들어난 web 2.0 의 열기에 긴장 됐는지 현장 실황을 해왔고, 그대로 나에게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일단, 팀 오라일리가 등장하는 다음달, 이 열기는 보일러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단번에 열기가 아닌 현상이 될 조짐이다.


Web 2.0 을 간소적확하게 접하고 싶다면 이정환 닷컴의 관련 포스트를 무료로 읽어 보길 바란다.


고로, 여기서 국민의 9.9할이 모르는 web 2.0 에 대해서, 9.9할에 포함되는 사람으로써 되던 안되던 기술 논리를 펼 생각이 없다. 열기가 있는 영장류 속에 냉담한 파충류로 사는 것을 즐겼던 속사정을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지만, 열기에 대한 경계는 확실하다. 열기를 즐기는 혈액일 수록, 어떤 현안에서도 무임승차에 익숙해질테고 그때마다 쌓인 촛농은 주체를 다른 것과 다르지 않게 일반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다행스러운 건 web 2.0 이 다루는 소재가 독과점적인 MS 나 네이버의 폐쇄회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별한 테크놀로지의 플랫폼에서 사용자의 편의성을 미끼로 던지는 윈도우가 아니라 것, 확장성 브라우저 지원, 어느 언어도 탐색 가능한 유니코드, 사용자 경험의 확대를 위한 AJAX 등이 기동되어 인간 활동에 의해 만들어 가지는 메카니즘의 창조를 돕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한 플랫폼이 아니라(혹자는 web 2.0 이 플랫폼의 변화라고 하는데, 귀에 걸던걸 코에 걸었다고 플랫폼이 달라지진 않는다.)인간활동에 의해 만들어 가지는 메카니즘 이란데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데, 정보의 분류에 참여하고 해석하는데, 마지막으로 정보를 생산해내는데 협력적이냐는 물음에 긍정적이어야 성립되는 메카니즘 되겠다. 컨퍼런스에 스피커나 참석자는 web 2.0의 메카니즘을 더 이상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실체로 접근하고자는 사람들이다.(그래서 나는 신봉자에게 비즈니스적으로 "누가 먼저 실천하는가" 만 남았음을 설했다.)


잠시, web 2.0 의 개념적 원칙인 참여구조가 가져오는 네트워크 효과, 체계질서의 혁신과 분산되고 독립된 개발자들을 끌어 모으려고 짜인 사이트, 콘텐츠 신디케이션에 의해 가능해지는 가벼운 사업모델, 소프트웨어 채택 순환의 종결(영원한 베타), 긴꼬리 효과(Long Tail) 등에 기대어 현실의 열기와 더불어 생각해볼 때 역시 대한민국이란 씁쓸한 단정은 허술하지 않다.

다시, 컨퍼런스에서.. 참여구조와 체계질서의 혁신에 열기를 보여준 0.5할의 참여자들에게 묻는다, 컨퍼런스 스피커가 과연 이 참여와 혁신에 적합한지 의문은 들지 않았는가?, web 2.0 을 핑계 삼아 성장 동력으로 삼기에 충분한 정보 권력자들이 모여 열기를 팽창 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싸이좋게 살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한 SK, 내 정보는 내 정보 니 정보도 내 정보인 네이버가 web 2.0 을 얘기하고 그에 열광한다?
어쩐지 이 열기는 그들이 앞으로 분명히 펼칠 한국형 web 2.0 의 출발이며 독점적 정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전 포석 쯤으로 보인다. 나는 그 열기에서 2년전 노무현 정권이 보여준 정보 통합의 마인드, NEIS 의 사상을 보게 된다.


인간의 적극적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질 어떤 메카니즘이 체제의 혁신에서 비롯될 것이란 희망적인 메시지는 단숨에 한국형 체제의 종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정보 통합을 통한 권력의 유지를 선호하는 실용진보의 씁쓸함을 느낀다.(정보의 통합은 정보의 권력을 낳는다. 왜냐하면 통합은 독점을 의미하고 독점속에 나누어야 생기는 기본권은 줄어 들거나 없어지기 때문이다.) 참여와 혁신을 통한 정보의 질적 향상도 애초에 어떤 2.0 속에서도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보의 질적 향상은 정보의 양적 보편성에 대한 반기이지만, 나아가 정보 복지 즉, 나누는 정보로 이어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특히, 정보를 이합집산하고 그를 통해 자본 계정을 만들어야 하는 네이버 같은 집단은 폐쇄성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체험적으로 구글 애드센스를 설치해보았으나, 그로 인해 구글이 web 2.0 의 모범생인지, 수혜자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게다가 의심까지...)
한국형 web 2.0 은 우연에 기댄 낮은 정치 수준에서 원칙없는 모호성이 가미 되어 체제 2.0 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2006/02/15 22:03 2006/02/15 22:03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